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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는 언제 걷힐는지? -3-
정 씨의 말에 칠듯이 포악하던 이 씨는 벌써 여러 잔 째 마신 탓인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거센 바람에 그을은 그의 얼굴은 붉다 못해 바위의 이끼처럼 푸릇푸릇 했다. 정 씨에게 한바탕 넉살좋게 언성을 높이던 그는 화제를 바꿨다. "바다도 흉년이여! 연안에선 씨종자가 남아나기나 하겠어? 유자망과 머구리에다 조태, 닻배. 통발. 원양어선. 저인망. 후리장. 선망. 오징어 채낚기. 멸치배. 멍텅구리. 고대고리. 어군탐지기까지 동원되어 마구 잡아들이기만 허이 이래가지고 뱃놈들이 우찌 살끼라고 치어까지 마구 잡아들이고, 허이 고연놈으 시상!." 시큼하고 들척지근한 소주냄새를 풍기며 정 씨의 말에 투깔스럽게 언성이 높아갔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표출이며, 한꺼번에 거북하던 뱃속을 토악질 해내듯 몹쓸 기분을 털어버리려 안간힘을 쓰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손등을 타고 툭 불거진 혈맥이 유난히도 푸르렀다. 파랗게 질렸던 두려움이 아직도 배어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채념이라도 하려는 의도가 감정의 곳곳에 숨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 많은 괘기 중에서도 명태란 놈이 제일 으뜸이지!" 그러자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창밖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정 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려, 지방태와 원양태. 크기에 따라 노가리. 소태. 중태. 대태. 언놈은 동태. 말리는 상태에 따라 황태. 북어. 춘태. 추태. 건조대에서 떨어진 건 낙태.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아놈들 때문에 마신 술이 수월찮을 거구만!." 술기운이 도는지 그의 눈자위가 명태알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원양어선을 타고 동지나해까지 나가서 작업을 하였다. 갑판에서 그물을 놓다가 높하늬의 거센 파도에 나동그라졌다. 그물을 당기는 롤러의 와이어에 왼손이 감겨 손가락 전체가 몽땅 잘려나갔다. 그 후론 배를 타지 않고 주로 덕장 일과 보일러 일을 거들었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손가락이 몽땅 잘려나간 그를 보고 사람들은 조막손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익주는 다시 잔을 비우고 명태 살점을 씹었다. 찝질한 이 맛에 이런 애환이 배어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창가로 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하늘도 검고 바다도 검었다. 지난 모든 것들을 깡그리 잊고 싶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면 지금의 하늘과 바다처럼 검게 칠을 했을 것이다. 그는 해직되자 여러 달을 무위도식하며 살았다. 아내의 얼굴에 낀 짙은 그늘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야채와 과일 행상을 하게되었다. 겨우 시작한 그 일이 학교 수업처럼 보람있고 순조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행상을 집어치운 뒤 등산을 하기 시작하였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그에게는 유일한 벗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릴없이 보내는 나날 속에서 조락하고 있었다. 시득부득한 그의 의지는 갈청같이 얇아만 갔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한 아내가 어느날 느닷없이 언니 얘기를 꺼냈다. "속초 언니네나 다녀와야 겠어요." "갑자기 그 곳은 뭣하러 갈려고?" "당신 이대로 나가다가는 뭔가 일저지를 사람 같아요. 이젠 그만 잊어버리세요. 그런 당신보담 저는 더 힘들어요.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전화로 당신 얘길 했더니 왜 진작 알리지 않았냐면서 당장 내려오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우리 식구가 내려가서 과연 정착할 수 있는 지도 알아봐야 하겠기에 한 번 내려갈까 해요." 그런 후에 언니네 집을 다녀 온 아내에게 설득되어 억지가 아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따라나선 것이 지금의 생활이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빚쟁이 야반도주하듯, 갑자기 얼마 안 되는 이삿짐을 달랑 싣고 직행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가파른 산허리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아스팔트 길은 시커먼 먹구렁이의 잔등 같이 꾸불꾸불 길게 뻗어있었다. 고요한 산의 적요가 능선에 머물고, 우람하게 치솟은 전나무의 끝이 하늘에 꼿혀 있는 것 같았다. 떡갈나무와 굴참나무의 구겨진 잎들이 바람에 자지러지며 떨고 있었다. 다시는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자는 줄만 알았던 석진이 눈을 배시시 뜨고 한참을 박을 보다 말을 했다. "아빠! 정말 속초에 가서 살거야? 거기 가면 우리 집도 있고 고기도 잡을 수 있는 거야? 그럼, 이젠 곯아 깨진 수박 안 먹어도 되고 짓무른 딸기 안 먹어도 되고?" "으음, 그렇고 말고. 속초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야 하나봐. 석진이 이제 그런 걱정 안 해도 될꺼야. " 석진은 안심이 되는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고만 있았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막연함 뿐이었다. 녀석의 입에서 느닷없이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는데 정말 황당했다.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잊어버리지도 않는 걸까. 군복무 시절에 병참 수송차량의 운전병이었다. 해직되어 한참이나 방황한 끝에 결국은 살기위한 방편으로 뭔가를 해야만 했다. 궁리 끝에 퇴직금으로 사글세방을 얻고 나머지로 소형 중고트럭을 한 대 구입했다.남루한 작업복에 운동화 끈을 동여 매고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한적한 도로를 냅다 달렸다. 가락시장까지는 20여분, 간간이 새벽바람이 동살을 몰고 왔다. 고속도로를 밤새 달려 온 대형 트럭이 붐비는 이른 시각. 도매상에서 야채를 사서 싣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아침 나절에 팔지 못하면 시들해져서 제 값을 받질 못했다. 시드는 잎사귀와 대궁에 물도 뿌리고 부채질도 했다. 처음에는 여름철 과일을 팔았다. 연립주택 담벼락에 차를 대고 핸드 마이크로 외쳐댔다. '싱싱한 과일이 왔습니다. 꿀수박. 꿀참외. 딸기. 도마도도 싱싱합니다.'몇 번이고 외치고 나자 갑자기 챙피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행상을 하리라고는 꿈도 꾸질 못했는데, 그 때의 그 처지가 꼭 승용차의 장식 바구니 속에서 반점을 키우며 시들어 가는 모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쑥스럽고 비참해지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낭패를 겪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몰랐다. 초여름 주택가 골목으로 나른하게 실바람이 이는 날이었다. 여자들이 재잘대며 모여들었다. 샌달 끄는 소리 . 껌을 씹는 소리도 글렸다. 과일을 고르는 여자들 중에서도 얼굴이 곱상하고 여린 여자는 유난스레 호들갑스러웠다. 그녀 손톱의 메니큐어 색은 유난히도 붉었다. 꽃삽같이 뾰족한 손톱으로 소나무 껍질처럼 덕개가 붙은 곳을 후비며 '이 수박 상한 것 아녜요?' 하는 그녀의 손톱에서 딱지가 떨어지자 푸르딩딩한 껍질 속이 드러났다.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다른 것을 고르고 있었다. "아주머니. 상하다니요? 오늘 새벽 밭에서 따 온 겁니다. 자 보세요. " 그는 전대에서 과도를 꺼내 세모로 도려냈다. 빨간 속살이 쇄기처럼 칼끝에 꼿혀 나왔다. 성근 까만 씨가 윤기가 흘렀다. '이래도 썩었습니까?' 하며 자신만만하게 메니큐어에게 내밀었다.그러자 여자는 아니꼽다는 듯이 쥐었던 수박을 놓고 돌아설 참이었다. 창피를 무릎쓰고 어렵사리 시작한 장사인데 안 사면 말지 괜한 생트집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수박을 시멘트 바닥에 냅다 내동댕이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났다. 싯벌건 수박 살점이 메니큐어 여자의 살색 스타킹에 튀었다. "어머!이 아저시 봐. 수박은 왜 깨뜨리고 난리예요? 장사하는 사람이 정말 별꼴이야! 별게 다 있어. 혜진 엄마 어서 가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후벼 팠지만 멍한 상태에서 어떻게 할 바를 몰라 한참이나 멍한 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여자들이 가버리자 그는 이마에 돋는 땀을 연신 닦으면서 담 아래 주져앉았다. 후끈한 감정이 기도를 타고 삐져 올라왔다. 애꿋은 담배만 볼이 패도록 빨아 댔다. 아들 녀석이 생각났다. 잡히는 대로 과일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자꾸만 비굴해지는 것 같았다. 맥이 빠졌다. 그래도 하나의 오기로 버텼는 지도 몰랐다. 주위의 시선 속에서 자존심을 밀짚모자 하나로 가리면 되는 졸 알았다. 행상을 그만 두고 아파트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져날랐다. 그는 다리심 하나는 튼튼하다고 자부했었다.그러나 맬빵을 맨 어깨에 물집이 생기고 살가죽이 벗겨졌다. 그 일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욱욱 쑤시는 어깨를 치료하고 돌아오면서 그 때 탈퇴를 해야 했다고 후회를 하였다. 다만, 양호 선생이 곤란해질 것 같아 탈퇴를 하지 못했는 지도 모를 일이라 푸념을 하였다. - 계 속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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