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사람 -4-
날이 밝았다. 밤새 내린 눈이 발목을 덮었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다. 들리는 건 눈발이 날리는 음산한 바람소리뿐이다. 다시 어둠이 찾아 들었다. 문풍지 두드리는 소리에 혹시나 하고 화들짝 방문을 열었다. 불빛에 보이는 건 목화송이 만한 눈 뭉치가 하루살이 긁듯 안마당을 휘젓는다. 서말 댁은 울산 큰딸한테 전화를 신청했다. "여보세요" 느릿한 외손녀의 목소리가 서말 댁의 귀속에다 간질 밥을 먹인다. "누구니?" "아름인데요" "그래 나 자라실골 외할미다." "할머니 안녕 하셨어요?" "온냐 엄마보구 전화 좀 받으라구 해라" "엄마 전화---!" 사위와 딸에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고만 고만해 자기이" "엄마 전화 왔어!" "누군데에?" "자라실골 외할머니야" 갑자기 웃음소리가 끊겼다. 볏섬을 썰던 쥐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굴속으로 숨어버리듯 잠잠하다. "얘가 왜 이렇게 뜸을 드리나 원" "엄마 전화-!" 외손녀가 악을 써댔다. "가, 공부해!" 외손녀"로부터 수화기를 낚아채는 딸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유?" 풀 죽은 목소리다. "이것아 전화 좀 빨랑빨랑 받으면 어디가 덧나니?" 서말 댁은 참고 참았던 분풀이를 딸한테 퍼붓다 말고 아랫목을 살폈다. 아무 말도 없이 담담하게 앉아있던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엄만 왜 큰 소리유" "집에다 전화질 좀 하면 손목이 얼어 붙는다디?" "엄만 아직두 시골에 있는 거유? 서울 큰오빤 보상비 갔다 뭘 했나 몰라 부모도 안 모셔가구. 엄마 난, 어떻하면 좋아" "왜 또" "시부모님이 장남도 아닌 우리 집에 와서 사신 대잖아" "형편이 그러면 할 수 없는 거 아니니"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하구 아버지 모실려구 했는데……" 딸애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엄마 시골에 있지 말고 서울로 가아" 서말 댁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엄마 내말 들려?" "끊었나?" "끊어 졌어." 사위 김 서방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끊었나봐 자기 어때 내 연기솜씨" "멋져 아주 일품이야" '불알 값도 못하는 눔……' 서말 댁은 수화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남편한테 다가갔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방바닥이 얼음장이다. 손목을 잡았다. 차디찬 나무장작이다. 평생을 두고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이지만 어째 섬뜩한 죽음의 냄새가 묻어 났다. "여보 춥지 않우?" 왜 춥지 않을까 모든 걸 체념한 모습이다. "애들이 곧 온댔어유 불편하시드래두 조금만 견딥시다. 그리구 낼랑은 차를 대절해서라두 보령읍내루 치료받으러 갑시다." 남편이 몸을 뒤챘다. 메주콩 삶는 냄새가 났다. 서말 댁은 남편의 사타구니를 만졌다. 기저귀를 갈아준다는 게 깜박 잊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시아버지를 어느 며느리인들 살갑게 대해줄까' 하는 생각에 한숨을 쉬면서도 서울 큰며느리가 계모임을 마치고 돌아온다는 날을 달력에다 표시를 해두고 손꼽아 기다리다 오늘이라는 것을 알고 서울에다 전화를 신청했다. "블광동입니다." 손녀의 목소리다. "금주구나 자라실골 할미다 에미 좀 얼릉 바꿔라." "고다아 고오! 하하 호호 깔깔" 설악산에 갔다 오긴 왔나보다. 여편네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며느리의 호들갑스런 웃음소리가 그간의 기다림에 찬물을 끼얹는다. "엄마 전화" "패 돌리고" "금주 엄마 뭐해 확 까지 않구" "까긴 뭘 까라구 그랴 죽어도 고오다 씨이" "이것들이 뻥을 치는 모양이네 그랴" 서말 댁은 수화기에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엄마 전화" 손녀가 전화 받으라고 재촉을 한다. "젠장 쓰리고에다 광박까지 먹었네" "서방 죽고 얼마 만이냐" "엄마 전화 왔어" "누군데 그랴 읎다 그러지 않구 열불 나서 죽겠구먼" "자리실골 할머니야" "여보세욧" 며느리의 음성이 가만히 들렸다. 서말 댁은 요년하고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오는걸 간신히 참았다. "에미냐? 자라실 골이다" 서말 댁은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머 아유 아유 유유유 오 호호호 어머님 어쩐 일이세요?" 며느리의 웃음소리가 십리 밖까지 늘어진다. "어쩐 일이긴 시부모 모셔 가기로 한 날짜가 언젠데 통 말이 없냐? 기별이 망조가 든 것두 아닐테구" "아유 어머님두 조금만 기다리시지 않구 보일러가 자꾸 말썽을 피는 바람에" "그 눔의 보일는지, 남방인지 일년 내내 뚝딱거릴 참이냐" "아유 어머님두 비비꼬시기는 아무튼 조그만 기다리세욧, 시일 내로 모셔다 꽃방석에 납짝커니 앉혀 드릴 테니까요" "너야 말루 왼 새끼 꼬듯 비꼬지 말아 누가 꽃방석에다 앉혀 달랬냐. 그리구 설악산엔 왜 갔다온거냐?" "어머니두 참 이웃 부인들하고 겸사겸사 해서 눈 구경갔다 온걸 가지고 투정을 부리세요, 코흘리게 모양" 며느리는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자라실 골에도 눈이 경치게 왔다. 설악산에 가지말구 일루 오려무나" "어머니두 눈두 눈 나름이죠 자라실 골 눈은 낭만이 없잖아요" '불여우 같은 년 보상비 갖고 오만짓거리를 하고 다니는구먼.! 내가 코 흘리게라구 말뽄대가리허군' "여보세욧! 어머니! 끊겼나" "금주네 뭐해 빨리 오지 않구" "어따 제기랄 요란 떠네 고까짓 보상비 몇 푼 주고는 얹혀 살 작정이구먼"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탱 하고 서말 댁의 귀속을 후볐다. 자식들보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가슴을 후비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앙칼진 소리였다. "부모 속엔 부처가 들어있고 자식 속엔 칼날이 들어 있다더니……그저 부모는 문서 없는 종일 수밖에. 인력으로 막아낼 수 없는 조악한 인풍인 마당에 내 자식이라고 해서 별다를까!" 서말 댁은 남편의 가래 끓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면서 밖에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침나절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차를 몰고 이 밤중이라도 올는지‥‥서말 댁은 반신반의하면서 밖에다 귀를 세웠다. "그려 왔으면 벌써 왔겠지 여즉 안 올까 부모가 눈 구덩이에 파묻혀 있는 것두 모르는 무심한 자식들 같으니라구.!" 밖에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 흥이 목소리다. 서말 댁은 문을 열었다. "둘째니이‥‥"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있던 눈 뭉치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였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린다. 사흘째 퍼붓는 눈발이다. 눈이 댓돌까지 차고 올라섰다. 갑자기 형광등이 깜박깜박 대더니 슬그머니 꺼졌다. 아랫목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소리만 들렸다. 어둠 속에서 한동안 앉아 있어도 전깃불은 들어올 줄 모른다. 서말 댁은 더듬거리며 성냥갑을 찾았다. 서랍에서 반 토막 짜리 초를 꺼내 불을 밝혔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