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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相思花)의 마음 ^
상사화 (相思花)의 마음 박진영 1. 그리움의 꽃 전라남도 고창군에는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울 만큼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는 선운산(禪雲山)이 있다. 그리고 그 산에는 백제 위덕왕 577년에 창건되었다는 선운사(禪雲寺)라는 절이 천오백년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선운사는 창건 당시 89개의 암자에 삼 천여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국내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선운사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왕건에게 귀순하기 전 유폐되었던 곳으로 유명한 금산사와 더불어 전라남도의 2대 조계종 본사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선운사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수 있다. 70년대와 80년대 통기타 가수로 잘 알려진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를 들어본 적이 있으면 말이다. 그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라고. 선운사 대웅전 뒤편 산비탈 오천여 평에 몰려있는 삼천여 그루의 동백꽃이 만발하면 주위는 온통 적색으로 물든다. 다른 꽃들처럼 시들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함박 피어있는 꽃송이가 그대로 낙하하는 동백. 낙하하는 꽃송이와 새로 피어나는 꽃송이의 모습에서 삶의 생과 사가 공존하는 것을 보는 듯한 비애를 느끼며 송창식의 노래는 떠나가는 님에게 말한다.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라고.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선운사의 이야기는 하지만 동백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의 선운사 이야기는 동백과 더불어 선운사의 명물로 알려진 상사화로부터 시작됐다. 몇 해 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기내 잡지를 읽게 되었고, 그 달의 기내 잡지는 선운사와 선운사의 상사화, 그리고 상사화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알뿌리 식물인 상사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그 꽃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옛날 선운사에 외모가 수려한 젊은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불공을 드리러온 한 처녀가 그 스님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처녀는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 처녀가 묻힌 무덤에 핀 꽃이 상사화라는 것이다. 속세의 인연을 끊는 것이 불가의 기본일텐데, 상사화의 이야기처럼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절이 선운사 뿐 만이 아닌 것을 보면, 인간의 정이란 그리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반영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노년의 김일엽 스님은 탐방을 간 기자에게 "역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랑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감정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던 것인가. 상사화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보다 나에게 좀 더 애뜻한 것은 "서로 그리워하는" (相思) 운명을 가진 상사화의 꽃과 잎의 현실이었다. 상사화는 초봄, 혹은 겨울 눈 속에서 난처럼 생긴 잎대가 올라오는데, 이 잎은 5-6월경이 되면 시들어서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꽃밭은 폐허가 되고, 그 빈터에서 7월경이 되면 꽃대가 솟아올라 8월에는 꽃이 홀로 피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다고 해서 잎과 꽃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 상사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운사의 상사화는 추석을 전후로 하여 피는데, 선운산 계곡을 중심으로 3 km 군락을 이룬다. 초가을 골짜기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녘이면 상사화 군락이 핏빛처럼 붉다고 한다. 그 날 비행기 안에서 사상화의 이야기를 읽고, 나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세상에, 내가 나를 볼 수 없다니,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나는 상사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상사화의 꽃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표현처럼, 지극히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세상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상사화 하나뿐이랴. 그렇지만, 잎이 꽃을 그리워해야 하다니,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왠지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이 꽃에 처음으로 상사화라는 이름을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잎과 꽃이 서로 엇갈린다고 해서 꼭 그 둘이 서로를 그리워할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꽃과 잎은 서로를 미워할 수도 있고, 그러므로 상사화의 이름은 "미움"이나 "갈등," 혹은 "절별" 또는 심지어 "독선(獨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꽃에게 이름을 준 그 사람은 잎과 꽃에게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 사람은 분명 그리움을 가슴 가득 담고 있었던 사람이리라. 자신의 그리움이 그의 몸 세포 마디마디에 맺혀 있지 않고야,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이 식물을 보고 그리움이라는 옷을 입혀 주었겠는가. 그 사람이 그리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생각해 본다. 상사화의 잎과 꽃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상 상사화의 비극은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사화의 비극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버릴 수 없는 운명이라는데 있었다. 꽃과 잎은 철두철미하게 한 생명이므로. 나와 나의 삶처럼. 2. 시인의 마음 구재기 시인은 <상사화>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지나는 바람과 마주하여 나뭇잎 하나 흔들리고 네 보이지 않는 모습에 내 가슴 온통 흔들리어 네 또한 흔들리리라는 착각에 오늘도 나는 너를 생각할 뿐 정말로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 속의 날 지우는 것이다. 언젠가 학생들과 술을 마시며, 이 시의 첫 두 귀절을 영어로 번역해서 읊어 준 적이 있었다. 이제 이십대 초반인 그들에게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라는 표현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다. 내가 이 귀절을 읊고 나자,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다시 한번 읊어 달라고했다. 나는 다시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라고 말을 했고, 그러고 나자, 학생들은 철학과 학생답게 이 귀절의 철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그 날 그들과의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나는 이 귀절에서 내가 느꼈던 그 무엇을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근현대 서양철학의 대표적 주제 중 하나인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를 예로 들어 이런 저런 시도를 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대상을 통해 투영된 우리의 관념을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가 대상을 사랑하려면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주체가 타자를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일인가 아닌가. 만일 단지 우리가 투영해 놓은 일정의 이미지와 관념을 상대편에서 봄으로써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대상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라는 것과 비슷한 설명을 했을 것이고, 결국 학생들은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여주긴 했지만, 결코 동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개연성 없는 의사소통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의미체계'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이란 한 개인의 지극히도 주관적 세계에 또 다른 개인을 포함시키는 행위이고, 두 주관의 세계가 여백 없이 맞물려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사랑은 언제나 사랑의 불가능을 확인하는 일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사랑은 언제나 개인이 자신의 주관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투영하는 짝사랑인 것이다. 개체의 주관적 세계를 사랑의 대상에 투영하며, 주체와 객체의 세계가 만났다고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만, 그러나 주체의 투영은 사랑하는 사람에서 정지하지 않고 그 대상을 통과하여 언제나 저 너머로 간다. 주체와 저 너머에 투영된 주체의 상념은 사랑을 그리움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시인은 말한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도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내 안으로 들어온 객체, 그리하여 주체를 뒤흔드는 객체, 그러나 주체를 흔드는 객체는 진정 객체 그 자체의 모습일까? 아니면, 그 객체는 이미 주체에 의해 변형된 객체인가? 그 객체를 통해 주체가 가고자하는 곳은 어디일까? 만일 주체가 원하는 것이 사랑의 대상인 그 객체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사랑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그리움은 어느 순간에 끝이 나야 한다. 그리고 그 곳에 사랑의 완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움의 끝은, 아이러닉하게도,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그리므로 사랑의 끝을 보고 있는 시인의 언어는 양극단을 달린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관조적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아니면 지극히 자학적이 된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꽃아다오.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끝을 위해 준비를 해와도,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분산시켜 그대로 사랑의 꽃병에 자신을 넣어버려도, 사랑은 완성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자신의 몸을 분질러 사랑의 꽃병에 꽃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자신의 상념에 일말의 동조를 얻고 싶어하는,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주체의 갈망은 언제나 우리의 존재 주위를 떠다니고 있기에. 때로는 거만하게, 때로는 멍하게, 때로는 소리내어, 또 때로는 조용히, 주체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인이 말하듯이: 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 그냥 무심히 그 앞을 지날 수가 없다 해가 진다 어두워 오는 마음에 불을 켠 듯한 이름 하나 없을까 사각의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 수첩을 뒤적이지만 가을 억새가 나부끼는 빈 들판에 나는 서 있고 이런 마음을 들켜도 좋을 편안한 이름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공중전화를 보면 그래도 동전을 찾는다. (신달자, <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 3. 갈 수 없는 나라 시인은 왜 이런 글을 쓰는 걸까? 우리는 또 왜 이런 시편들을 읽으며 마음 아파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학생들을 위해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라는 싯귀의 의미를 표현해 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두 귀절의 시가 내 가슴을 스치면서 일으킨 바람, 그 물결을 잡을 수는 없었다. 시인의 언어를 만났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바람, 이 물결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프로이드 이후 정신분석학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1901-1981)은 문학과 정신분석학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두 다른 체제라고 말했다. 예술의 중요성을 예술의 무의식세계와의 관계 하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프로이드처럼, 라캉 역시 문학은 우리가 일상세계, 일상의 언어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가 미끄러진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세계가 미끄러진 언어를 통해 나타난다? 프로이드(1856-1939)는 그의 초기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인간의 정신을 의식 (conscious), 전의식 (preconscious) 그리고 무의식(unconscious)의 세단계로 설명했다. 의식의 세계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세계다. 지금 당장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영역이다. 전의식의 세계는 지금 당장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생각해내려고 하면 기억에서 살아나는 의식이다. 무의식은 우리의 의지적 작용에 의해서 재생해 낼 수 없지만 우리의 사고 어딘가에 깊숙이 존재하는 세계다. 예를 들자면 이럴 것이다. 물건을 정리할 때 우리는 당장 쓸 것은 쉽게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둔다. 의식의 세계다. 당장 쓰지는 않지만 언젠가 소용이 있을 것은 대충 정리해서 집안의 이곳 저곳에 넣어둔다. 필요할 때 그것이 어디 있더라 하고 생각해서 꺼내 쓸 수 있는 것이다. 전의식의 세계가 이럴 것이다. 그런데, 어디엔가 잘 저장해 놓고 저장해 놓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딘가에 무엇이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의식의 영역에서 밀려난 세계다. 더욱 문제는 우리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우리는 잊어버렸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는데,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 그것이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내가 알고 있지 못한 내 안의 그 어떤 세계가 나의 의식 세계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무의식의 세계에 저장된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잘 포장을 해서 어디에다 감추어 놓고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식에 의해 우리의 기억에서 추방당한 과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어머니가 외출을 한 동안 어머니 화장품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돌연 어머니가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화장품을 침대 밑 어디엔가에 감추어버렸다고 하자. 그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립스틱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놀라서 그 화장품을 침대 어디론가 감추어버렸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의 놀람과 당황함, 공포와 긴장은 어린아이의 마음 어디엔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어른이 되어도 백화점에서 화장품 코너에 갈 때마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느끼는데, 그 이유를 이제 어른이 된 아이는 논리적으로 알 수가 없다.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화장품 장난에의 기억을 무의식 속에 감추게 하는가. 그것은 아이의 죄의식이다. 어머니의 화장품을 침대 밑에 감추듯, 하지 말았어야하는 화장품 장난을 했다는 사실을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사고 저 밑바닥에 감추어 버리고, 그 기억의 재생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의 형성과정은 항상 "성(性)"의 경험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 시절 부모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목격한 아이는 보아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았다는 죄의식 때문에 이 기억을 의식계로부터 추방하는 것이다. 주체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를 거부하기에, 이 경험의 기억은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그 아이의 의식계에 떠오르게된다. 우리는 대부분 "성(性)"에 대해 보수적이고, 따라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화장품 장난과 연결 지었을 때는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하다가도, 부모의 성관계와 관련을 지으면, 글쎄,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의식을 굳이 프로이드처럼 성과 연결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의 내부 안에 우리가 이성으로, 우리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존재 상황이며, 따라서 각 개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분명하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론적 근거로써도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은 우리에게 충분히 중요성을 갖는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중에서 무의식의 발견을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규정한다. 정신분석학 분야에서 뿐 아니라, 무의식의 존재를 통해서 보는 프로이드의 인간 이해는 근대 서구 사상을 지배해온 인간존재의 이해를 전적으로 뒤흔드는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구 근대철학은 이성적 사고를 인간 존재의 근본으로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며 나아가 인간의 삶을 발전시킨다는 해방의 논리를 펼쳤다. 그러한 인간 개념에 맞서서 인간 개 개인 안에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각자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이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지배한다는 정신분석학의 이론은 데카르트적 존재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사실상 "내"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이미 분열된 자아, 즉 "자/아" 인 것이다. 라캉은 이처럼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우리의 모습을 "실재" (the real), "상상"(the imaginary), 그리고 "상징" (the symbolic)이라는 세 차원을 통해 설명한다. 우선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자. 라캉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는 이미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분열된 자/我의 소유자라면, 우리는 왜 정신병원에 있지 않고, 자신이 통일된 자아를 가진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라캉은 이를 "상상계"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상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단계를 라캉은 '거울단계' (mirror stage)라고 부른다. 거울 단계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생후 육개월에서 십팔개월 사이의 어린 아이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이 전까지 아이는 "나"라는 인식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타자"라는 인식도 없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아이는 드디어 배경과는 구별되는 "나"라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거울을 통해 본 "나"의 모습은 아이의 자기인식에 두 가지 돌이킬 수 없은 상황을 형성한다. 첫째는 통일된 존재로 "자아"의 인식이다.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에는 어떠한 결핍도 부재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은 그대로 하나의 통일된 모습이며 따라서 아이는 "나"는 통일된 주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둘째로 "나"라는 인식의 시작은 나와 타자의 구분의 시작이며 결국 소외의 시작이기도하다. "나"라는 인식을 통해 아이는 그 이전에 아이가 속했었을 분리 이전의 세계, 통합의 세계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인간과 강아지와, 대기중의 공기와 딸기와 이 모든 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하나를 형성했던 그 세계-- 그런 원초적 통합의 세계에서 이탈되어 아이는 이제 "개체화된 존재"의 짐을 짊어져야하는 것이다. 거울단계의 "상상계"에서 형성된 우리가 독립적 자아를 갖었다는 개념은 "상징계"에서 더욱 구체화된다고 라캉은 말한다. "상징계"는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상징체제를 일컫는다. 신호등의 파란색은 차가 갈 수 있다는 상징이다. 차도는 차가 지나가는 도로라는 상징이고, 인도는 인간이 걸어다니는 길이라는 상징이다. 100원짜리 동전은 그 사회의 100원이라는 가치의 상징이다. 한 마디로 법과 규칙이 존재하는 세계다. "상징계"를 대표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체계다. 인간은 태어나서 언어를 배움으로써 그 언어의 규칙을 습득함과 동시에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의 관습, 사고 양식을 머리 속에, 몸 안에, 그리고 마음에 까지 새겨 넣는다. 그러므로 "상징계"의 세계 안에서 다른 존재들과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라캉에게 삶이란 "상상계"에서 형성된 상상적 자아가 "상징계"의 언어체계를 통해 소외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징"세계의 압력은 점점 현실이 되어간다. 그 세계의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는 한 그 인간은 그 사회에 동화될 수 없다. 사회의 구성원이 "상징계"의 법을 준수함으로써 사회라고 불리우는 "상징계"는 그 힘을 유지하고, 그 대가로 구성원에게, 상징의 세계 내에서 권력을 나누어 주고, 구성원은 하나의 사회 안에 속했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공생의 원리다. 아이가 거울 단계를 통해 "나"라는 개념을 형성해 내기 이전에 있었던 그 어떤 원초적인 통합의 세계를 라캉은 "실재"라고 부른다. 이 "실재"는 주체가 영원히 잃어버린 그 세계이며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길이 막힌 세계다. 돌아갈 길이 막혔으므로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금 과장하고 도치시켜서 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역사는 1950년 6월 25일 00시00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 한국 전쟁에 대한 기사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접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은 "상징계"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상징계"를 유지하는 언어, 그 세계의 기록의 법칙과 사고 양식 안에서 형성된 자료들이다. 그 자료는 따라서 이미 "상징" 세계의 규칙에 의해 한 번 걸러진 자료이지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1950년 6월 25일 00시00분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 그리고 그 일들을 조정한 세계적 움직임을 모두 포함한 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실재"의 세계이다. 이 "실재"의 세계를 누가 접근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장 우리 앞에 있는 컴퓨터도 전체를 한번에 볼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컴퓨터를 대하고 있는 방향에서, 내 시력의 한도와, 내 사고의 한도 내에서 컴퓨터를 볼뿐이다. 컴퓨터의 "모든 것"을 한 시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즉 "전지전능"은 신에게나 속하는 영역이며, 우리는 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는 순간 순간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존재의 모든 것이 함께 존재하는 그 복합성의 세계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재"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하는가, 우리는 묻는다. 모순적이지만, 라캉은 언어를 통해서 이 세계의 삐져나옴을 언뜻 언뜻 본다고 말한다. 여기에 언어의 이중적인 모습이 있다. 언어의 규칙은 우리의 사회 즉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의 요소다. "상징계" 자체가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를 소통하며, 언어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언어가 "상징계"에 반기를 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시장에 가서 "고등어 주세요"라는 말을 했을 때, 생선가게 주인이 나의 의미를 알아듣고, 고등어를 주고, 내가 고등어 값을 치르고, 그 고등어를 구워먹고, 그 생선가게 주인은 고등어 판 돈으로 세금도 내고,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것이다. 언어의 법칙을 통해 "상징계"인 인간의 사회는 지속된다. 그러나 만일 내가 꽃집에 가서 "고등어 주세요"라고 했다면,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 또한 어느 시인이, "나는 꽃집에 가서/ 고등어를 달라고 했다."라고 시를 썼다면 이때의 고등어는 내가 사용한 고등어와 같은 의미인가 다른 의미인가. 꽃집에 가서 고등어를 달라고 하는 나를 꽃집 주인은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꽃집에 가서 고등어를 달라고 했다는 싯귀를 읽고 그 글을 쓴 시인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의 세계는 "상징계"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그 무너지는 틈틈 사이로 우리가 "실재"의 모습과 문득 문득 마주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의 세계에서 "상징계"의 언어 질서가 전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꽃집과, 시인과, 고등어가 새로운 의미체계를 형성하지만 이 새로운 의미체계는 이전 의미체제에 의거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도미노 현상처럼, 시인, 꽃집, 고등어라는 언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미끄러지면서 꽃집도, 고등어도 시인도 아닌 그 어떤 의미를 형성해 낸다. 꽃집, 시인, 고등어 자체는 상징계의 언어지만, 이들이 어우러져서 상징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징계의 "결손 (lack)"이 그 모습을 언뜻 비추는 것이다. [사랑은 햇볕 속에 웃고 있는 조약돌이다.] 라캉은 "미끄러진 언어"와 언어의 미끄러짐을 통해 드러나는 "실재"에 대한 한 예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사랑은 물론 조약돌이 아니다. 또한 조약돌은 무생물이므로 웃을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 햇볕, 조약돌의 웃음이라는 겉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상념들이 모여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과 연관 짓은 그 무엇, 따스함, 화사함, 행복감... 그러면서 그 어느 한마디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 안도 없고 밖도 없는, 따라서 소외도 없는 그 충만의 세계인 "실재"의 일부가 문득 그 한 모습을 내비친다. 미국의 유명한 언어학자이자 정치학교수인 놈 촘스키는 언어학에서 의미론과 구문론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문을 만든 적이 있다. [색깔 없이 푸른 상념들이 맹렬하게 자고 있다]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촘스키에 따르면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으므로 구문론 상에서는 옳은 문장이지만, 의미론적 차원에서 보면 틀린 문장이다. 의미론은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형성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다. 예를 들자면, "사과"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현실에 존재하는 사과의 모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과"라는 언어 표현, 혹은 "기표"(記標, signifier)가 어떻게 우리의 언어 체제 안에서 "사과"라는 의미, 즉 "기의" (記意, signifier)와 연결되어 의사 소통이 이루어 지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언어학자는 각 단어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설명한다. 예를 들어 "상념"은 무생물에 적용되는 단어이고, "잠을 자다"는 생물에만 적용이 가능하다. "색깔이 없는"은 색깔이라는 가치에는 마이너스 (-)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푸른"이라는 색깔의 가치의 플러스 (+)를 가진 단어와 함께 쓰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의미론의 가치체계로 볼 때, "색깔 없이 푸른 상념들이 맹렬하게 자고 있다"는 문장은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어도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서 시인의 마음으로 이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잠을 자고 있는 그 어떤 구체화되지 않은 상념들, 너무나 어슴푸레해서 어떠한 색깔인지도 말할 수 없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르스름하게 가슴의 언덕에서 삐져나오려고 하는 우리의 생각들, 지금은 모습이 뚜렷하지 않지만, 어느 날인가는 나의 언어를 통해 나타날 그 사고의 기미들의 꿈틀거림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상징계의 가치에 반기를 든 미끄러진 언어들을 통해 "실재"가 빠끔히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다. 이처럼 "상징계"에서 사용되는 언어체계가 미끄러지면서 "실재"의 일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작용을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사회에서의 혁명이 그 사회의 고착적, 폐쇄적 체제와 관습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일어나듯이, 시인의 언어 역시 "상징계"의 고착성을 넘어서, 우리 존재의 내면적 그 어떤 모습에 가까운 "실재"를 보기 위한 시인의 반란인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볼 수 없는 그 세계, 갈 수 없는 그 나라를 라캉은 "무의식의 세계"로 표현했고,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코라" (chora)로 표현한다. 문학은, 그리하여, 이 갈 수 없는 나라, 라캉이 "실재"라고 명한 우리의 삶의 근원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갈망의 표현인 지도 모른다. 서양철학의 시원에서 플라톤은 시인을 자신의 이상국가인 공화국으로부터 추방시켰다. 플라톤에게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데아의 반영일 뿐이며, 그 현실의 모사를 시도하는 시인은 진실인 이데아에서 두 번이나 멀어진 세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플라톤은 시인이란 진리를 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혼돈을 야기시키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공허한 상상으로 현실 저 너머의 그 어딘가를 향하는 시인의 소리는 비현실적이며,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진리가 아닌 허구이기에 비도덕적이라는 플라톤의 시론은, 그러나, 라캉과 크리스테바의 탈현대 이론에서 그 힘을 잃는다. 세계는 인간이 꿈꾸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지도 않고,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도 없다. 그 불분명한 세계의 일원인 인간은 한 때 인간이 꿈꾸고 있었던 것처럼 삶과 세계와 존재에 대한 명쾌한 답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서구의 근대철학은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遍在)라는 인간이 자신들의 언어의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그려낸 절대자의 모습을 약간씩 모방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써 인간의 모습을 그리며, 자신들이 만든 인간의 모습에 도취되고자 했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은, 그리고 라캉과 크리스테바의 언어 철학은, 인간은 결코 자신들이 만든 신이라는 원형의 모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철학이 오랜동안 원해왔던 것처럼, 단 한마디로 표현될 수 있는 진리-- 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존재는, 그리고 삶은 인간에 의해 한마디로 정갈하게 표현되기를 거부한다. 궁극적 기의의 부재는 우리를 비관적 세계관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삶의 의미를 단정할 수 있는, 그리하여 이 세계의 존재 이유를 보여줄 그 결정적 단어는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다. 우리의 꿈은 언제나 언어를 통한 기표들의 춤이었다. 심지어 철학까지도. 따라서 프랑스 철학자 라쿠-라바흐트는 묻는다. 이제 철학도, 철학이란 문학과 마찬가지로 우화(寓話 fable)라는 것을 인정해야할 시기가 아닌지. 철학 역시 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허구의 세계임을 직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구라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문학은 그리고 철학은, 모순되게도, 그것이 우리가 만든 이야기이기에 더 진실인지도 모른다. 4. 그 여름, 그 거리에서 상사화 이야기를 처음 읽은 여름, 나는 서울을 거쳐 북경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갔었다. 나에게는 첫번째 중국 여행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도 중국이라는 이름 대신 내가 한국을 떠날 때의 중국의 이름이었던 "중공"이라는 이름을 들추어내서 한국에서 만난 후배에게 야단을 맞은 상태였다. 그 만큼 중국은 나에게 멀리 있었다. 중국 철학을 강의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한국과 미국을 줄긋기에 바빴고, 나의 삶은 언제나 그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2008년 올림픽 개최지 승인을 막 받아낸 북경은 들떠 있었다. 하루 밤사이에 빌딩이 들어선다는 북경의 도로 이곳 저곳은 공사로 파헤쳐져 있었고, 자전거와 자동차와 사람이 사이좋게 함께 이용하는 북경의 차도는 나에게는 생경했다. 7월말 북경의 햇볕은 따가 왔고, 북경의 그 낯설음 한 가운데에 서서 나는, 문득, 내가 왜 그곳에 있는 지 물었다. 물론 현실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왜였을까? 북경 여름 볕 아래 그 거리에 서서 문득 나의 존재를 보고자 했던 것은. 철학자 칸트는 하늘의 별을 보며, 인간 안에 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 자신이 믿었던 도덕성의 우주적 원천을 확인했지만, 칸트가 아닌 우리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의 존재가 중심을 잃는 것을 느낄 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그 어느 순간에 우주 안 어디에서인가 빛을 발해 우리에게 그 순간 다가온 저 별빛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무한대의 한 모습이며, 무한대라는 시간과 공간이 주는 어색함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공기 중의 미세한 티끌 보다 작게 축소되어 우주의 어둠 속으로 날라가 버린다.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종로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 그 물결과 구분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누구인지, 저 객체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주체란 누구인지 우리는 묻게 된다. 그럴 때 마다, 우리의 생경한 자아가 만나는 것은 불가능의 세계다. 어떠한 언어로도,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는 삶의 부조리. 살아있다는 것의 불가능성. 주체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주체가 살아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그리고 나와 나의 삶 사이의 이처럼 분명하고도 설명되지 않는 이질감을 느낄 때면, 우리는 진저리를 친다. 그래도 불가능의 세계에 숨어 있을 것 같은 삶의 얼굴, 존재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꽃을 보고 싶어하는 상사화의 잎처럼. 삶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이었고, 언제고 그럴 것이다.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결코 둘일 수 없이 하나인 상사화처럼, 삶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그 진실에 손을 대지 못하고, 단지 우리와 삶을 엮는 그 어떤 끊을 수 없이 흐르는 수액(樹液)을 느낄 뿐이리라. 낯선 곳에 섰을 때, 문득, 복받치듯 밀려오는 존재와의 만남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서럽고 가끔은 느끼하고, 그리고 많은 경우 어색하다. 어쩌면 그렇게 조금씩 그 만남의 농도를 묽게 해가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어색함, 그 느끼함, 그 불가능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을 지도 모를, 그래서 우리가 진저리를 칠 때, 함께 진저리 처 주는 시늉을 해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우리는 만나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삶은 비극이면서, 또한 희극이기도 하다. 삶의 벌판에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하는 시인처럼, 우리는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살면서도,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말을 해도 좋을 누군가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사랑은 그리움이리라. 우리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함께, 우리 누구도 갈 수 없는 그 나라를 엿보고자 하는 열망이기에.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은 존재와의 만남에서 구토를 느낀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손에 드는 순간, 이 존재들의 무의미성은 그에게 구토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들 존재의 무의미성은 로캉탱 자신의 존재의 부조리성이기도 했다. 신을 잃어버린 이십세기의 문학은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삶은 부조리하고, 삶은 무(無)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신에게 빚진 것이 없고, 따라서 우리는 자유라고 말하는 실존주의 철학은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인간의 모순적 반항이었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동지였으며, 그와의 계약 결혼으로 잘 알려졌던 시몬느 드 보브와르는 삶의 부조리성, 그 애매성(ambiguity) 자체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인간에게 책임을 지게 한다고, 애매성의 자유, 애매성의 윤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 애매성의 자유, 애매성의 윤리 역시 꽃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5. 다시 그리움의 꽃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초가을 아침, 선운사 계곡에 상사화가 붉게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상사화에게 그리움이란 이름을 처음 준 그 누군가를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 꽃을 보고 싶어했을 상사화의 잎을 생각하며, 상사화의 마음이 되어, 그들도 상사화의 명명자가 그리워했던 그 무엇을, 상사화와 더불어, 그리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님들 오늘하루도 행복하세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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