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류되지 않는 강 1
합류되지 않는 강
|
합류되지 않는 강
ROCKY(1971년)
이렇게 포근한 저녁이면 후조가 나르는 하늘이 황혼에 곱게 물들었을게다. 들리지 않는 사행곡 속에 거리를 두지 않고 무수히 져버리는
낙엽들…… 바람이 분다, 불고있다. 나의 기인 머리칼을 살랑 살랑 나부끼게 한다.
"일어서야지, 갈 곳은 오직 그곳. 어차피……"
그러면서도 선득 그 자릴 일어 서지는 못했다. 외롭고 울적한 나날을 조금이라도 메꿔보기 위해 찾는 자리 (잔디가 깔린 석탑 주위), 이미 떨어진 낙엽들로 인하여 잔디들의 존재를 가리웠지만……
사찰의 낡은 종각이 흘리고 간 기적 같은 음률이 석탑에 잠시 머물다가는가!
"아이 추워 !"
으시시 떨려 온다.
소녀의 아쉬운, 자리에 대한 애착은 아랑곳 없이 햇빛이 사라져 가는 산정의 싸늘한
공기는 앞가슴을 파고든다.
"가봐야지."
일어 섰다. 발길을 떼어 놓기 시작하였다. 소나무 사잇길을 벗어나서 외나무 다릴 하나 건너 한참 올라가 산모퉁이를 돌면 나의 안식처, 낡은 절 하나가 있다.
내가 찾을 곳이 이곳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퍼진다.
"정아니? 오늘 좀 늦었구나."
부엌에서 반갑게 대하는 스님의 자애스런 음성을 야속하게도 일소하
고 방으로 들어섰다. 따스한 열기가 나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렇지만…….. 외롭다. 이 상태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그 어떤 기적
은 없는 것일까? 불쌍한 소녀 정아, 정아야! 불가피한 나의 자학은
또 시작되었다. 십팔년 동안 그늘에서 지내온 내 뒤안길의 역사, 실로
크나큰 절망이였다. 병신이다. 불구자다. 그래 장님이란 말이다.
내 얼굴이 아무리 천사같이 예쁜들 한사람의 인간 값을 못하는 병신
이란 말이다. 레이다 구실을 하는 내 육감, 세인(世人)보다 몇 배 뛰
어난 청각, 실수없이 들어 맞는 내 예감이 병신이라는 이 엄격한 사실
앞에서 무슨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꿈으로, 무슨 희망을
바라며 이 가엾은 생명을 지속시켜 나갈 것 일까? 키들 키들 갑자기
어깨를 들먹거리고 웃어제켰다.
"호호…….호호호!"
웃음과 살아오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반발이 였을까? 미학을 창조
하려던 조물주도 나를 내려다 보는 이 순간 나처럼 이렇게 실없는 폭
소를 터뜨릴까? 얼마후 뜨겁게 흘러내리는 두줄기 눈물을 나는 인식
할 수 있었다. 소녀다운, 내 불구자다운 꿈을 체념의 계곡에 내던지
던 날 난 하늘을 향해 통곡했었다. 장님이 관찰하는 모든 사념이 정
상적인 인간의 일관성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조감이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차원 앞에서 맥없이 녹아버리던 그 날, 나는 기절하고 말았
었지, 지겹도록 외로운 길, 숨막히도록 고립된 길이었었다.
이젠 자학함으로써 얻어보던 시원함도 맥이 풀리고 나에게 남겨진
것이란 짜증과 삶에 대한 반항뿐이였다. (파랑새! 당신이 날아간 곳
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남겨준 그 깃털 하나만으로 당신의 행
방을 알기엔 너무도 막연하고 망막할 뿐입니다. 파랑새! 파랑새.....)
나의 독백은 다행히 피로해진 나를 잠들게 했나보다.
얼마쯤이었을까?
"정아! 밥 먹고 자거라 응? 어여 일어나."
늘 한참자고 밥먹는 버릇을 새삼스레이 깨워놓는 스님의 언동에 난
심한 반발을 내어 벌떡 일어났다. "안먹어요. 나같은 병신에게 뭘하
러 밥을 주나요? 싫어, 싫단 말이야!"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상을 밀어 넣고는 나가셨다. 나의 투정이 가소로워서가 아니라 불쌍
한 사람을 늘 회피하면서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함일까? 그럼 참
는다는 불교 의식의 사고방식 때문일까? 하여튼 나는 그게 싫단 말이
다. 왜 상대를 해주지 않는가! 차라리 병신이 병신질 한다고 욕이나
싫것 해주지 않는가 말이다. 억울했다. 또 울고 말았다.
어느날, 그날도 석탑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좀 늦어서 올라왔
다. 방에 들어섰다.
"아니?"
난 흠칫 놀랐다. 가급적이면 나를 피하시든 스님이 그날따라 내방에
들어와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정아! 밥먹자 배고플거야, 자."
그러고 수저를 쥐어준다. 순간 나의 예감은 어떤 예지 같은 걸 느꼈
다. 내 예감에 와 닿는 휘장을 나는 성질 그대로 다급하게 파 헤졌다.
"무슨 일이죠 스님?"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스님답지 않은 당황스런 음성, 그 꼬리는 가늘게 떨리는 여운을 남기
고 있었다.
＂뭐예요, 무슨 일이죠?"
"글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스님 절 속이는 건 아니죠? 말해주셔요."
"정아야 내가 널 속이다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정말이죠?"
"그럼 정말이지."
"정말?"
"글쎄 그렇다니까!"
순간 예리한 금속성 소리를 내며 내손에 쥐여졌던 숟가락은 밥상을 때렸다.
"뭐예요? 뭐냔 말이야."
"아아니? 정, 정아야 무슨 짓이야 응?"
"날 못 속여요. 난 병신이 아니란 말야. 스님까지 절 병신 취급하는거예요?"
"좋아요 좋단 말야, 흐흑"
칼날 같은 절규를 스님의 면전에 퍼붓고 난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달렸다. 맨발로…… 참을 수 없는 모욕, 난 이성을 팽
개쳐 버리고 무조건 달렸다. 살고싶지 않아, 죽을테야. 난 죽어야
해.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폭포가 가까워졌다. 달렸
다. 순간 내 두손을 나꿔체는 우악스런 힘, 비루한 땀냄새가 풍겨나
오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머슴 허서방일것 같다.
"놔! 놓으란말야, 죽고 말테야, 살고 싶지 않아, 흐흑."
"아씨! 이러면 않되유. 어쩔려구……."
"아냐, 놔. 않놔?"
나는 비분을 풀지 못해 허서방의 넓적한 앞가슴을
마구 쥐어뜯었다. 그리고 푹석 주저앉았다. 저주스러웠다. 모든게……
드디어 난 "으응"하고 어린애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정아야, 들어가자, 울지말고……"
스님 손에 잡힌 체 방으로 들어선 나는 계속 훌쩍거렸다.
"정아야! 내일 어떤 청년이 휴양하러 오면 당분간 정아와 같이 한방
에서 기거해야 될 것 같아."
"………예?……. 뭐라고요?"
내입은 볼품없이 벌어졌다. 뭐라 할까? 실로 어처구니 없는……
벌린 입이 닫혀지기 전 스님은 방을 나가셨다. 수많은 사람들의 요
청을 거절하시든 스님이 그런 말을 하시고, 거기다 나와 같이 지내
라니? 엉터리다. 엉터리…….. 순간 맥이 쑥 풀렸다. 방바닥에 푹석
주저앉았다. 그러나 서서히 치솟은 어떤 이지적인 기대감, 반면 비
례되는 불안감, 호기심들. 도통 잠을 이룰수 없었다.
마중 나갈까 하는 망설임으로 아침밥도 먹는둥 마는둥, 숫제 밥을
먹지 못했다.
"에잇! 한번쯤 부닥뜨려 볼 일인걸 뭐.. 가자!"
내 예쁘다
고 하는 얼굴은 연분홍으로 물들었을 게다.
아니 어쩜 파리하게 창백해졌을지도 모른다.
아침 길은 쌀쌀했다. 온기를 질투하듯 차거운 산 정기가 내 연약한
피부를 마구 육박해 든다. 그러나 발길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드디어
석탑 있는 곳엘 당도하였다. 늘 앉던 반석을 외면하고 이리 저리 서
성거리기만 하였다. 해가 떠오른가 보다. 비교적 넓은 공터인 이곳은
그래도 따사로운 햇볕을 아쉽지 않게 만끽 할 수 있는 곳이다.
싸매지 않은 내 두가슴은 오늘따라 더욱 요동하는 것 같았다. 시간
이 흐른다. 때까치가 싱겁게 울어댄다. 낙엽은 계속 내 얼굴에 와
한번씩 부딪치고는 떨어진다. 가을 해의 선용도 한계가 있는것 으스
스한 한기를 느꼈다. 안달이 났다. 짜증도 났다. 막연하나마 평상
시엔 그런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맹목적인 아니 스님의 말씀대로
라면 현실적인 이 기대감 앞에서 난 최초의 크나 큰 지루함을 느꼈다
고 지금도 기억된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지만 기다
리는 자신이 무척 가엾고 초라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그만
흑하고 울움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이 만일 나를 지켜 봤다면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 할까? 나같은 병신은 기다릴 자격도 없는거야.
그지? 아냐! 아냐……. 난 얼굴을 감싸쥐고 마구 흔들어 댔다.
아니? 인기척, 발자국 소리……. 가까워 진다. 점점 크게 들려온다.
닫혀진 눈꺼풀을 문질렀다. 속눈섭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옷 매무
새를 가다듬었다. 머리를 어루만졌다. 가까워진다. 점점………
성난 호랑이의 혓바닥이 내 얼굴을 핥는것 같다. 숨이 가뻐진다.
거의 질식 될 것 같다. 드디어….. 내 면전에 섰으리라는 예감,
폭삭 부서질 것 같은 위압감, 순간 난 홱 돌아섰다.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 정아라고 했지?"
맑고 낭낭한 음성. 그 매혹적인 음성에 난 금방 빨려든 듯 되돌아 서서
살포시 웃어줬다.
"제 이름을 어떻게…….."
"응 그건 스님이 가르쳐줬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지."
내 마음에 자리 잡던 우월감은 금시 거두어지고 나는 먼 창공을 솟아
오르는 것 같은 환희로 부풀어 올랐다. 그렇지만 부끄러웠다.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정아. 이제 올라가기로 할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놓았다. 순간 나는
내몸을 바짝 움크리고 말았다. 지극히 여자다운 본능이 장님인 나
에게도 조금은 있었던가 보다. 그 바람에 손은 내려졌다. 아쉬웠다.
한번 더 얹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서
걷기 시작하였다.
------------------ ♣ ♧ ♣ -----계속-----------
|
|
만남대행아르바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