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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순례 4] 忠定公 권벌선생과 닭실
충정공 권벌(權橃)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이다. 1478년(성종 9년)에 안동군 북후면 도촌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10살 때에 벌써 어려운 문장을 곧잘 맞추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세에 처음 진사에 뽑혔다가 30세(중종 2년)에 別試 丙科에 급제하고 종사랑이라는 직책을 받았다. 그 후에 예문관 검열과 사간원 正言, 예조좌랑을 지내고 부모를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 중종 9년에 永川군수를 지내고 성균관 사성과 도승지를 거쳐서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이 시대는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가 임금으로부터 신임을 받으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때였다. 그러나 조광조를 위시한 이들 신진세력들은 성급하고 그 氣像이 지나쳐서 홍경주(洪景舟) 등 연산군을 폐위시키는데 공이 있는 옛 세력과 서로 반목하여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 선생은 지난날 戊午年과 甲子年의 士禍를 생각해서 이 같은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양쪽 세력의 갈등을 조정하려 노력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고심하다가 스스로 강원도 三陟府使를 지원하여 갔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 종택우), 청암정(좌)과 닭실마을(아래)

그가 우려하던 바와 같이 洪景舟 등의 훈구세력들이 理想정치를 실현하려던 조광조(趙光祖) 등 士流들에게 집단적인 禍를 입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폭발하고 말았으니 선생의 나이 43세에 공직에서 파직되어 奉化邑 닭실에 내려와서 15년간 우울한 나날을 보내었다. 기묘사화는 趙光祖를 위시한 영남출신의 李長坤, 金安國, 金正國 등 당대의 실력자 40여명이 모두 화를 입었다. 

선생은 15년 동안 奉化에 은둔하면서 강학(講學)에 몰두하다가 중종 28년(1533)에 복직되어 密陽부사로 나갔으나 얼마 후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하고 향리에서 지냈다. 중종33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중종 34년(1539)에 한성판윤이 된 후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동35년 병조판서(兵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좌참찬(左參贊)으로 계속 승차되었으며 인종1년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임금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되었다.  





유곡리 청암정(명승사적 제3호)

삼계서원(三溪書院) 


봉화읍 삼계리 152-2 삼계서원 전경(뒷쪽이 사당)

1546년 明宗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선생이 원상(院相)으로 승정원에서 정무에 깊이 참여하는 중에 乙巳士禍가 일어났다. 그것은 실권자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仁宗의 외척 尹任과 갈등을 빚은 사화였다. 선생은 서로의 반목을 해소하고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를 권하다가 다시 파직된 후 명종 2년(1547)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사건에 몰려 구례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그곳에서 평안도 삭주(朔州)로 옮겨진 이듬해인 明宗 3년(1548) 3월에 71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충재선생 신도비(서원내)

명종 21년(1567)에 복권되었고 선조 2년(1568)에는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선조 4년(1570)에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렸다. 선조24년(1594)  중국의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잘못 기재된 조선 왕가의 혈통을 고쳐서 인쇄한 <대명회전>이 출간되자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고 영의정(領議政)으로 가증되고  光國原從一等功臣의 녹권과 친진부조(親盡不祧)은전이 내렸다. 

선조2년 퇴계 이황(李滉)이 시장을 지었으며 선조34년 삼계서원이 완공되어 충정사(忠定祠)위판을 봉안하였으며 인조1년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朴淳과 鄭經世가 짖고 金尙容이 전서하였다. 그리고 효종 10년 인금이 사액(賜額)하였다.





충재선생 사당(충정공사, 서원내)

先生의 思想과 學問 




유곡리 충재선생 사당

    선생은  趙光祖, 金安國, 金正國, 金淨 金述 등과 친했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유학파이다. 도학을 높이고 인신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아 至治를 일으켜서 정치를 깨우치며 유학을 흥기하는 일이었다. 이 정신은 바로 영남유학의 학풍이었으며, 선생은 조정에서 이를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선생은 한때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과격한 논의를 조정하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오히려 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죽음을 당했지만 선생의 이러한 정신은 영남 사림학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선생이 죽은 후 이황, 정구, 이이와 송시열 등이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불의에 굽히지 않은 그의 고매한 도학정신의 구현 때문이었다. 선생은 평소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었으나 나라의 일이나 義理에 있어서는 과감하고 추상같이 대하였다고 한다. 宣祖 임금이나 당대의 碩學인 율곡 李珥, 우암 宋時烈 같은이도 선생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평하였다. 

평생동안 주자학(朱子學)에 몰두하면서 <근사록近思錄>을 연구한 선생의 사상은 첫째, 人心과 道心을 정상적으로 하고 마음을 바르게 닦는 것을 강조하고, 둘째, 미래의 良心을 잃지 않고 자신을 살피는 方途를 강조하며 경(敬)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도학을 높이고 몸을 바르게 하여 성현(聖賢)을 본받아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일으켜서 임금이 정치를 바르게 하도록 도리를 깨우쳐 주며 유학(儒學)을 일으켜서 조정이 스스로 실천하게 함으로써 후세에 좋은 귀감이 되었다. 

  선생이 젊었을 때의 일화 한토막이 전하여 오는데, 중종 임금이 어느 해 봄  정원에서 늦도록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누군가가 책 한 권을 주어 왔다. 「이 책이 놀던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고 말하자, 임금은「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하였다. 




 닭실(酉谷)의 유래와 人傑




유곡리 닭실 충재선생 종택

판서공(判書公) 인(靷)이 고려가 망함을 슬퍼하여 安東 所夜村(現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은거하여 청절(淸節)을 지키며 호를 송파(松坡)라 했으니 이는 송도를 잊지 못함을 뜻함이며 마을이름 소야(所夜)도 송파로 고치게 되었다. 닭실은 입향조인 충재(冲齋)선생의 5대조인 예의판서(禮儀判書) 인(靷)을 파조로 한 판서공파(判書公派)인데 安東魯洞, 松夜, 鳴洞, 順興, 石南, 靑松, 新漢, 安東道村, 醴泉, 渚谷, 奉化, 佳邱, 酉谷 등지에 살고 있다. 

판서공의 증손 개(玠)와 곤(琨)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고향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玠는 하위지(河緯地)의 조카 원(源)을 사위로 맞아 松坡에서 함께 살았으며 琨은 ‘동풍촉혼산東風蜀魂酸 서일노릉한西日魯陵寒’이란 시를 읊었는데 충재선조의 조부이시다. 곤의 아들 의정공(議政公) 사빈(士彬)은 외가인 서원정씨(西原鄭氏)가 사는 도지촌(刀只村, 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으로 옮겼으며 冲齋선생도 여기에서 출생하였다. 

닭실은 충재공의 외조부 尹塘이 살던 곳으로 윤당은 世祖가 지봉(芝峯)의 가솔을 절멸시키려 하자 유곡에 숨어 살았으며 一男二女를 두었는데 아들은 縣監을 지낸 여필(汝弼)이다. 딸은 生員 權士彬과 혼인하여 四男一女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감을 지낸 야옹공(野翁公) 의(檥)이며 후손들은 안동 도촌, 예천, 저곡에 살며 둘째가 충재선생 벌(橃)이요, 다음에 딸인데 이함(李諴)에게 출가했고, 다음이 찰방(察訪) 벼슬을 지낸 례(欚)요, 막내가 문과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正字를 지낸 제촌공(霽村公) 장(檣)이다. 






미수 허목이 쓴 마지막 글 청암수석 靑岩水石

야옹공과 제촌공은 예천 맛질에서 살았고 충재선생과 찰방공은 닭실(酉谷)에서 살았는데 찰방공은 자손이 없다. 충재선생의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여 닭실, 물야면 서리, 법전, 춘양, 강릉을 비롯하여 서울, 대구 등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충재선생 이후 닭실권씨는 문과급제 16명, 小科급제 59명, 參判 2명, 府尹 1명, 方伯守令 12명, 義兵長 3명이며, 광복 후 국회의원 2명, 차관 2명, 대학총장 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 2명이며, 서원에 배향된 분이 5명이며, 불천위(不遷位) 1명, 功臣 1명이다. 




닭실은 山川秀麗(산천의 아름다움), 文筆不絶(문장, 명필이 대를 이음), 忠節之鄕(충의와 정절의 고장)으로 특히 영남지방에서 ‘문필마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천하를 놀라게 할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할아버지, 아버지의 명예에 누를 끼칠까봐 나타내지 않고 또한 형제간에 서로 양보하며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文集과 遺稿를 남긴 분이 90여 명이다. 

특히 주옥같은 詩 300여편을 남긴 충재선생의 증손인 백운자 상명(白雲子 尙明)은 당대의 명인인 택당 이식(澤堂 李植), 北渚, 金應祖, 白沙, 尹暄, 杜谷 洪宇定 등과 교류했으며 5대손에 이르러 이른바 28斗라 하여 ‘字’ 항열 28명이 道學과 文筆로 크게 알려졌으며 

  닭실(酉谷)의 육기(六奇)라 하여 荷塘의 文(5대손 斗寅), 蒼雪齋의 詩(5대손 斗經), 大拙子의 筆(5대손 斗應), 江左의 才(6대손 萬), 平菴의 忠(7대손 正枕), 松館子의 畵(7대손 正敎) 그리고 닭실(酉谷)의 삼절(三絶)이라 하여 白雲子 尙遠의 시, 大拙子 斗應의 글씨, 松館子 正敎의 그림을 꼽는다. 




  닭실(酉谷)의 遺蹟




충재선생 박물관(봉화읍 유곡리) 2007.9.15 준공

청암정(靑巖亭) 

中宗 26년(1526)에 충재선생이 창건한 정자로서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큰마을 宗宅 서편에 위치하며 사적명승(史蹟名勝) 제3호로 보존되고 있다. 거북처럼 생긴 큰바위 위에 세로 14尺, 가로 20尺의 규모로 춘양목으로 지었는데 주위에 연못이 둘러 있고 뜰에서 亭子까지는 돌다리가 놓여 있으며 향나무, 노송, 느티나무, 버드나무들이 꽉 차 있고, 바위 사이에는 철쭉과 단풍나무가 自生한다. 퇴계 李滉,  백암 金功, 백담 具鳳齡,  관원 朴啓賢, 習齋 權擘, 번암 蔡濟恭, 눌은 李光庭의 현판 글이 있으며 眉叟 許穆이 88세에 쓴 마지막 글씨 絶筆 篆字體 懸板 「靑岩水石」4자가 있다. 봄 철쭉, 여름의 매미소리, 가을 달, 겨울 눈꽃은 청암정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석천정사(石泉精舍) 





석천장사(석천계곡) 충재선생 장자 청암공이 창건한 명승사적 제3호

닭실의 시냇물을 따라 굽이 돌아가면 조선 중종 30년 乙未(1535)에 충재선생의 장자 청암공 동보(靑巖公 東輔)가 先志를 계승하여 창건한 정자로서 청암정과 함께 사적명승 제 3호로 보존되고 있다. 間架는 34칸, 구조는 춘양목으로 세로 12尺, 가로 14尺, 익랑(翼廊)이 각 10尺이며 기와는 문화적 제품이다. 주위는 奇巖絶壁과 老松으로 장관을 이루고 수정같이 맑은 물은 계곡을 감돌아 흘러 누각을 수명루(水明樓)라 이름 하였으며 정자 뒤뜰에서 烏竹이 自生하고 바위 사이에는 샘이 있어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수명루(석천정사)

 삼계서원(三溪書院) 




삼계서원 관물루(서원 정문)

봉화읍 삼계리 152-2번지에 있다. 충재(冲齋) 權橃先生을 享祀한 서원으로 宣祖 21년 (1588)에 건립하여 묘호(廟號)를 충정사(忠定祀)라 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오다가 현종 元年(1660)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석천계곡의 맑은 물과 물야천(物野川)이 합수하는 지점으로 경관이 좋으며 봉화유림(奉化儒林)의 본거지이자 1905년 구한말 을사의병(乙巳義兵)의 始發地이기도 하다.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복설하여 春秋로 제향(祭享)하고 있다. 


 보물(寶物) 

先祖의 유물은 매우 많았으나 실전되고 현재 보물 제 261호인 <冲齋日記>와 262호인 <近思錄>을 비롯해 896호인 <回籍類> 15종 18책, 901호인 「고문서」15종 274책, 902호인 「遺墨」8종 4점 등 482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여 보관하였는데 정부는 2007.9.15 청암정 뒤에 새로 유물관을 크게 신축하여 준공하였다. 이는 다만 宗宅에 보관된 것뿐이며 私家에 보관된 支孫들의 유물도 상당수가 있다

충재일기(冲齋日記) 

이는 冲齋 權橃先生이 손수 적은 日記이다.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中宗 2년, 1507년 藝文館 檢閱로 있을 때의 30세때 日記), 당후일기(堂後日記) 2책(中宗 4년 正月~同5년 3월), 승선일기(承宣日記) 2책(中宗 13년 5월~11월, 副承旨-都承旨 때의 日記, 41세 때), 其他日記 1冊. 모두 冲齋의 친필 寫本으로 그의 文集인 <충재집冲齋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을 편찬하는 데도 자료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근사록(近思錄) 

보물제 262호로서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함께 성리학독본(性理學讀本)의 쌍벽(雙璧)이 되는 <近思錄>은 宋의 유학자(儒學者) 옆채(葉采)가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에서 골라 편찬한 것으로 매우 희귀한 고려본(高麗本)이며, 冲齋의 수택본(手澤本)일뿐더러 正祖의 序文이 있고 冲齋가 늘 지니고 다니며, 中宗 앞에서 進講까지 한 이 책의 由來를 들은 英祖는 그 22년, 冲齋의 後孫 權萬에 명하여 이 책을 가져다 보았고 또 正祖는 그 18년 序文을 지어 左副承旨에게 글을 쓰게 하여 本孫에 돌려 주었다.

                                             <현봉 권경석, 자료제공:현강 권석조> 





금계포란형 닭실마을


지도로 보는 봉화 유곡리 충재선생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