僕射公 諱守洪 判書公 諱靷 忠定公 諱橃 冲齋博物館 入三陟派祖 諱凍 諱禧度 諱禧度系 世系圖  
      <先祖探究>                   五代祖 諱 禧度(희도)
朝鮮最高의 忠節 忠定公 諱橃의 後裔 脫於里洞을 試圖하시다.
 
29세 휘희도(禧度)의 字는 이중(彛重)으로 憲宗2年(1836)에 나서 1866년 3월 5일 31세로 夭折하셨으나 슬하에 두 아들(載慇, 載化)을 두셨다. 墓所는 下長面 於里 大谷 乙坐에, 配 順興安氏는 敎完의 딸로 1831년에 나서 1892년 5월 7일 62세로 돌아가시고 묘소는 龍淵寺 右側 壬坐에 각각 계셨으나 西紀 2011년 辛卯 寒食에 旌善郡 新東邑 鳥飛峙 曾孫 垕淵墓域으로 移墓하고 5代孫 起燮이 家族墓碑를 세웠다.
30세 휘재은(載慇)의 字는 화실(化實)이고 哲宗2年(1851)에 나서 1908년 8월 23일 58세로 卒하셨으며, 묘소는 旌善郡 新東 鳥飛峙 酉坐에, 配 江陵崔氏는 智哲의 딸로 1846年에 나서 1921년 1월 21일에 76세로 돌아가셨으며 墓所는 下士美 靑甫村 庚坐에 계시다가 西紀 2011년 辛卯 寒食에 旌善郡 新東 鳥飛峙 諱禧度先塋 子坐合窆
諱載慇께서는 父親에 이어 鄕里發展에 盡力하여 오랫동안 尊敬을 받으셨으며, 다섯아들을 두시니 장자 肇夏(조하)는 堂叔 載宇에 出系하였고 다음으로 鎬夏(호하), 銖夏(수하), 錞夏(순하), 鎦夏(유하)이시다.
31세 휘호하(鎬夏)의 字는 운경(雲慶)으로 高宗8年(1871)에 나서 1939년 3월 3일 69세로 卒하셨고, 配 密陽朴氏는 章根의 딸로 1874年에 나서 1914년 7월 11일 44세로 돌아가셨고 墓所는 영월 화원리 子坐와 酉坐에 계시다가 신묘 한식에 旌善郡 新東 鳥飛峙 諱禧度先塋 子坐에 合窆으로 移墓.
曾祖父 諱鎬夏께서는 일찌기 父親으로 부터 修學하여 醫術과 易術에 能하셔서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사시었고 新東으로 옮겨오셔서 開拓의 어려움을 克復하셨다,세 아들을 두시니 長男이 諱垕淵이고, 둘째가 諱苾淵 字聖達인데 寧越에 定着하여 相龍 相甲 相煥 相七 네 아들을 두셨고, 셋째는 諱蓴淵 字壽達인데 榮州에 居하면서 세 아들을 두시니 相泰 相福 相元이다. 32세 휘후연(垕淵)의 字는 삼달(三達)이며 高宗32年(1895)에 나서 1965년 71세로 돌아가셨고 할머니 江陵咸氏는 炳鎬의 딸로 1898年에 나서 1950년 정월 6일 돌아가셔서 旌善郡 新東 鳥飛峙 先塋 子坐合附로 永眠하고 계신다.
祖父 諱垕淵께서는 性品이 溫和하고 仁慈하셔서 화내는 일이 없으셨고 獨學하여 神通術을 지니셔서 많은 아픈 사람들을 治癒하여 주시곤 하셨는데 그 尊影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세 아들을 두셨는데 相俊 相吉 相益이요,相俊은 두 아들 起燮과 永燮을 두셨고 相吉은 後嗣가 없고 相益은 두 아들 泰燮과 奎燮을 두셨다.
아,先親 諱相俊,日帝强占期 解放 動亂 祖國近代化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醉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愛酒人生,父親三年喪 하루도 屈巾麻衣를 벗지 않았고 草笠을 쓰고 다니시던 孝子人生,子息 敎育에는 아낌이 없었고 風流를 즐기시던 自由人生, 언제나 생각이 납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詩經에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사랑하니, 떨어져 있어도 멀어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간직하니,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으리오! (詩云 心乎愛矣 遐不謂矣 心中藏之 何日忘之)



                                                                   處士安東權公諱禧度之家族墓碑


安東權氏二十九世孫 諱禧度與直系後孫之家族墓地也. 始祖 太師公權幸, 權本新羅宗姓金氏也. 新羅末後百濟甄萱入新羅弑王辱妃漫行, 公曰萱之不道 義不共戴天 大破甄萱軍於甁山, 麗祖喜曰幸也 能炳幾識達權 宜可謂有權矣 賜姓權 封高麗三韓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大相 太師, 昇郡爲安東府 賜安東爲食邑. 二世 郎中公 諱仁幸, 三世 正朝戶長諱冊後 至於代代安東戶長, 十世 僕射公諱守洪 爲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尙書左僕射上將軍 孫盛門輝. 時年 權門分十五派 此僕射公派之始. 十五世 判書公諱靷 爲禮儀判書,判書公支派祖.
안동권씨 이십구세손 휘희도여직계후손지가족묘지야. 시조 태사공권행, 권본신라종성김씨야. 신라말후백제견훤 입신라시왕욕비만행, 공왈훤지부도 의불공대천 대파견훤군어병산, 여조희왈행야 능병기식달권의가위유권의 사성권 봉고려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 대상 태사, 승군위안동부 사안동위식읍. 이세 낭중공 휘인행, 삼세 정조호장휘책후 지어대대안동호장, 십세 복야공휘수홍 위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야상장군 손성문휘. 시년 권문분십오파 차복야공파지시. 십오세 판서공휘인 위예의판서 판서공지파조.  十九世 議政公諱士彬 字子野 號五先亭 爲弘文館觀象監事 以貴之橃 除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中宗十六年 移居奉化酉谷 開而奉化權門. 議政公娶于尹塘之女 生四男, 長諱檥字伯懼號野翁爲義興縣監,次諱橃,次諱欚爲承仕郞,次諱檣爲副提學. 십구세 의정공휘사빈자자야호오선정 위홍문관관상감사 이귀지벌 제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중종십육년 이거봉화유곡 개이봉화권문. 의정공취우윤당지녀 생사남, 장휘의자백구호야옹위의흥현감,차휘벌,차휘예위승사랑,차휘장위부제학. 二十世 諱橃字仲虛號冲齊又萱亭諡號忠定公, 中宗二年 文科登第 爲都承旨 禮曹參判, 中宗十四年 坐己卯士禍罷退處鄕里者十有四年 經學全念 授小兒文如常課. 命收敍除密陽府使 以後 爲漢城府判尹 知中樞府事 禮曹判書 左參贊 右贊成 院相. 甲辰冬 中廟上昇, 乙巳夏 仁廟繼陟明廟幼沖嗣位 外戚得勢 不止政爭 尹元衡託密旨誘劾去尹任 公持不可 俄而爲兵曹判書 俄罷職矣, 明宗二年 良才驛壁變上乃大加罪乙巳人付處求禮俄移朔州 得病遂終. 冲齊公好讀書 持近思錄 潛心性理之學 修身指針身踐矣. 數次士禍激變亂世 直言抗論 節介(文翼公曰公有死難不可奪之節 又退溪曰其言不信然也哉)之改革派政治人, 風神秀朗峻整 性儉厚靜 平生不變節義精神. 宣祖一年 雪寃復爵 贈左議政 賜諡忠定. 宣祖二十四年 以光國勳加贈領議政 賜不遷位奉祀親盡不祧恩典 配享三溪. 又公著冲齊日記(寶物第二六一號), 朝天錄, 冲齊逸稿 等. 奉化 冲齊博物館 保有寶物四八二點 遺物五千餘點. 落鄕後留講學于靑巖亭,正祖御製序文添近思錄(寶物第二六二號)所藏近思齊,不遷位祭廳 羹牆閣,位牌偤於三溪書院 在酉谷也. 配和順崔氏 男二 長卽諱東輔爲草溪郡守 次諱東美爲燕岐縣監.  이십세 휘벌 자중허호충제우훤정시호충정공, 중종이년 문과등제 위도승지 예조참판, 중종십사년 좌기묘사화파퇴처향리자십유사년 경학전념 수소아문여상과. 명수서제밀양부사 이후 위한성부판윤 지중추부사 예조판서 좌참찬 우찬성 원상. 갑진동 중묘상승, 을사하 인묘계척명묘유충사위 외척득세 부지정쟁 윤원형탁밀지유핵거윤임 공지불가 아이위병조판서 아파직의. 명종이년 양재역벽변상내대가죄을사인부처구례아이삭주 득병수종. 충제공호독서 지근사록 잠심성리지학 수신지침신천의. 수차사화격변난세 직언항론 절개(문익공왈공유사난불가탈지절 우퇴계왈기언불신연야재)지개혁파정치인. 풍신수랑준정 성검후정 평생불변절의정신. 선조일년 설원복작 증좌의정 사시충정. 선조이십사년 이광국훈가증영의정 사불천위봉사친진부조은전 배향삼계. 우공저충제일기(보물제이육일호), 조천록, 충제일고 등. 봉화 충제박물관 보유보물사육칠점 유물오천여점. 낙향후유강학우청암정, 중종어제서문첨근사록(보물제이육이호)소장근사제, 불천위제청갱장각, 위패유어삼계서원 재유곡야. 배화순최씨 남이 장즉휘동보위초계군수 차휘동미위연기현감.  二十四世 諱凍字元卿 三陟移居 入三陟派祖, 配丹陽禹氏 幽宅在下長於里山五十之三番地. 二十五世 諱斗寬 字聖信 爲折衝將軍 揮名聲乎 配蔚珍張氏 在於里三加谷甲坐. 二十六世 諱菖 在下士美葛里谷庚坐. 二十七世 諱正義 生諱思琡 在龍淵白楊田嶝子坐.  이십사세 휘동자원경 삼척이거 입삼척파조, 배단양우씨 유택재하장어리산오십지삼번지. 이십오세 휘두관자성신 위절충장군 휘명성호 배울진장씨 재어리삼가곡갑좌. 이십육세 휘창 재하사미갈리곡경좌. 이십칠세 휘정의 생휘사숙 재용연백양전등자좌.

五代祖諱禧度 於龍淵在幽宅之諱思琡之次子 學與德甚楊 娶順興安氏 生二男 諱載慇與諱載化. 高祖諱載慇 盡悴爲鄕 久而敬之, 有五男 長肇夏出系諱載宇后 次鎬夏 銖夏 錞夏 鎦夏. 曾祖諱鎬夏 能醫易 始以拓徙居新東, 擧三男 長卽垕淵, 次苾淵字聖達 居寧越 生四男 相龍 相甲 相煥 相七, 次蓴淵字壽達 居榮州 生三男 相泰 相福 相元. 祖諱垕淵字三達 性溫仁 鮮而唗己 獨習神術 施癒憂人, 有三男 相俊,相吉,相益. 相俊生二男 起燮 永燮. 相吉無后. 相益二男曰 泰燮 奎燮. 오대조휘희도 어용연재유택지휘사숙지차자, 학여덕심양 취순흥안씨 생이남 휘재은여휘재화. 고조휘재은 진췌위향 구이경지, 유오남 장조하출계휘재우후 차호하 수하 순하 유하. 증조휘호하 능의역 시이척사거신동, 거3남 장즉후연, 차필연자성달 거영월생사남 상용 상갑 상환 상칠, 차순연자수달 거영주 생삼남 상태 상복 상원. 조휘후연 자삼달 성온인 선이두기 독습신술 시유우인, 유삼남 상준 상길 상익. 상준생이남, 기섭 영섭. 상길무후. 상익이남왈 태섭 규섭.    先親諱相俊乎, 自日占期 解放 動亂 至現代 生以難世 不醉不生 愛酒人生, 父親三年喪 一日不釋屈巾麻衣 不出草笠 孝子人生, 非儉息敎 好謠樂風 自由人生, 豈不爾思 我不忘矣. 詩云 心乎愛矣 遐不謂矣 心中藏之 何日忘之, 歲月流去而世變矣 心慕祖上不如古 哀哉. 門論過以 今而移墓 五代祖 高祖 曾祖 氶於鳥飛峙先塋 謹願安眠, 於此基而 相和祖孫 氣爲我榮華哉. 선친휘상준호, 자일점기 해방 동란 지현대 생이난세 불취불생 애주인생, 부친삼년상 일일불석굴건마의 불출초립 효자인생, 비검식교 호요락풍 자유인생, 기불이사 아불망의. 시운 심호애의 하불위의 심중장지 하일망지. 세월유거이세변의 심모조상불여고 애재. 문론과이 금이이묘 오대조 고조 증조 승어조비치선영 근원안면. 어차기이 상화조손 기위아영화재. 

        

                                                              西紀 二千十一年 辛卯 寒食 安東權氏 三十四世孫 起 燮 謹呈

                                                              서기 이천십일년  신묘 한식 안동권씨 삼십사세손 기섭 근정


        

                                            처사안동권공휘희도지가족묘비


이 묘지는 안동권씨 이십구세손 휘희도(禧度)님과 그 직계후손의 가족묘지이다. 공(公)의 시조(始祖)는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이요. 권씨(權氏)는 본래 신라 왕성(新羅 王姓)인 김씨(金氏)이다. 신라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략하여 왕을 시해하고 왕비를 능욕하는 만행을 저지를 때 公께서 말씀하시기를 견훤의 부도덕은 의(義)로 하늘아래 같이 할 수 없다 하고 의병을 모아 병산(甁山)에서 견훤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고려태조(高麗太祖)가 기뻐서 말하기를 행(幸)은 능히 미기(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하며 권(權)으로 사성(賜姓)하고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보공신 대상 태사(三韓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大相 太師)에 봉(封)하고 군(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二世 낭중공(郎中公) 휘인행(仁幸), 三世 정조호장(正朝戶長) 휘책(冊) 이후 대대로 안동호장(安東戶長)으로 내려오다 十世 복야공(僕射公) 휘수홍(守洪)께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야상장군(尙書左僕射上將軍)을 지내시고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문중이 빛났다. 이 때 권문(權門)은 십오파(十五派)로 분파되었는데 이 분이 복야공파(僕射公派)의 파조이시다. 十五世 판서공(判書公) 휘인(靷)은 예의판서(禮儀判書)의 직에 올랐으며 판서공지파(判書公支派)의 지파조이시다. 十九世 의정공(議政公) 휘사빈(士彬)의 字는 자야(子野), 호(號)는 오선정(五先亭)이며 중종(中宗)때 홍문관관상감사(弘文館觀象監事)를 지내시고 아들 벌(橃)의 귀(貴)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제수되시었고 중종十六년에 봉화유곡(奉化酉谷)으로 이거하시니 봉화권문(奉化權門)의 으뜸이시다. 의정공께서는 윤당(尹塘)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시니 맏이는 휘의(檥)로 자는 백구(伯懼) 호(號)는 야옹(野翁)이며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으며, 둘째는 휘벌(橃)이요, 셋째는 휘예(欚)로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넷째는 휘장(檣)으로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二十世 휘벌(橃)의 字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또는 훤정(萱亭), 시호(諡號)는 충정공(忠定公)이시다, 中宗二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내셨는데 中宗十四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十四年을 경학(經學)에 전념하며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일상으로 하였다. 다시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제수받은 이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 좌참찬(左參贊) 우찬성(右贊成) 원상(院相)을 역임하셨다. 갑진(甲辰) 겨울에 中宗이 돌아가시고 을사(乙巳)여름에 또다시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시어 어린 명종(明宗)이 보위에 오르자 외척들이 득세하고 정쟁이 그치질 않았다.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문정대비(文正大妃)의 밀지(密旨)를 만들어 윤임(尹任)을 탄핵하여 제거하려 하자 公께서 불가함을 견지하였다. 이로 인해 소윤(小尹)의 미움을 사 병조판서로 전직(轉職)되고 곧이어 파직(罷職)되었으며, 명종(明宗)二年 대비(大妃)를 비방하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자 죄가 더해져 구례현(求禮縣)으로 부처(付處)되고 다시 삭주(朔州)로 이배(移配)되었으며, 그곳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충재공(冲齋公)께서는 독서를 좋아하셔서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지니고 다니셨는데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하셔서 수신지침(修身指針)을 몸소 실천하셨다. 수 차의 사화(士禍)로 격변하는 정세에서도 옳은 일에는 직언으로 항거하는 절개(문익공(文翼公)이 말하기를 죽음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절개라 하였고 퇴계 이황(李滉)선생은 그 말도 모자랄 정도이지요 라고 말했다 한다)의 개혁파 정치인의 삶을 사시었다. 풍채는 수려하고 밝고 크고 단정하셨고 성격은 검소하고 따뜻하고 조용했으며 평생을 변치 않는 절의정신(節義精神)으로 사셨다. 선조(宣祖)一年 관작(官爵)이 회복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고 충정공(忠定公) 시호(諡號)가 하사(下賜)되었으며 선조二十四年 국훈(國勳)이 더해져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불천위봉사(不遷位奉祀)라는 친진부조(親盡不祧)의 은전(恩典)과 함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또 충재공께서는 충재일기(冲齊日記, 寶物第二六一號), 조천록(朝天錄,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明나라에 갔다 오는 동안의 日記), 충재일고(冲齋逸稿) 등의 저서를 남기셨고, 봉화의 충재박물관(冲齊博物館)에는 보물급문화재 482점과 유물 5천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낙향 후 머무시며 강학(講學/하시던 청암정(靑巖亭), 정조(正祖)의 어제서문(御製序文)이 첨부된 근사록(近思錄, 보물제262號)을 소장한 근사재(近思齌), 불천위제청(不遷位祭廳)인 갱장각(羹牆閣)과 위패(位牌)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유곡(酉谷)에 있다. 배(配)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두 아들을 두시니 맏이는 휘동보(東輔)로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내셨고 둘째는 휘동미(東美)로 연기현감(燕岐縣監)을 지내셨다. 二十四世 휘동(凍)의 字는 원경(元卿),삼척(三陟)으로 이거하신 입삼척파조(入三陟派祖)이시며 배(配)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하장(下長) 어리(於里) 산五十의三번지에 유택이 있다.二十五世 휘두관(斗寬)의 字는 성신(聖信)이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명성을 떨치신 분이며 배는 울진장씨(蔚珍張氏)로 어리(於里) 삼가곡(三加谷) 갑좌에 영면하여 계신다. 二十六세 휘창(菖)께서는 어리 갈리곡(於里葛里谷) 경좌에, 二十七世 휘정의(正義)께서는 휘사숙(思琡)을 낳으셨고 용연 백양전등(龍淵白楊田嶝) 자좌에 유택이 있다.

오대조(五代祖) 휘희도(禧度)는 용연(龍淵)에 유택을 두신 휘사숙(思琡)의 둘째 아들로 학문과 덕망이 높으셨으며 순흥안씨(順興安氏)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시니 휘재은(載慇)과 휘재화(載化)이시다. 고조 휘재은(載慇)께서는 향리발전에 진력하여 오랫동안 존경을 받으셨으며 다섯 아들을 두시니 장자는 휘조하(肇夏)인데 당숙 휘재우(載宇)에 출계(出系)하였고 다음으로 호하(鎬夏) 수하(銖夏) 순하(錞夏) 유하(鎦夏)이시다. 증조 휘호하(鎬夏)께서는 의술(醫術)과 역술(易術)에 능하셨으며 신동(新東)으로 옮겨오셔서 개척의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세 아들을 두시니 장남이 휘후연(垕淵)이고 둘째가 휘필연(苾淵) 字 성달(聖達)인데 영월(寧越)에 정착하여 상용(相龍) 상갑(相甲) 상환(相煥) 상칠(相七) 네 아들을 두셨고, 셋째는 휘순연(蓴淵) 字 수달(壽達)인데 영주(榮州)에 거(居)하면서 세 아들을 두시니 상태(相泰) 상복(相福) 상원(相元)이다. 조부(祖父) 휘후연(垕淵) 字 삼달(三達)께서는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셔서 화내는 일이 없으셨고 독학하여 신통술(神通術)을 지니셔서 많은 아픈 사람들에게 치유(治癒)의 덕(德)을 베푸셨다, 세 아들을 두셨는데 상준(相俊) 상길(相吉) 상익(相益)이요, 상준(相俊)은 두 아들 기섭(起燮)과 영섭(永燮)을 두셨고 상길(相吉)은 후사(後嗣)가 없고 상익(相益)은 두 아들 태섭(泰燮)과 규섭(奎燮)을 두셨다. 아, 선친(先親) 휘상준(相俊), 일점기(日占期) 해방(解放) 동란(動亂) 현대(現代)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애주인생(愛酒人生), 부친삼년상(父親三年喪) 하루도 굴건마의(屈巾麻衣)를 벗지 않았고 초립(草笠)을 쓰고 다니시던 효자인생(孝子人生), 자식교육에는 아낌이 없었고 풍류를 즐기시던 자유인생(自由人生), 언제나 생각이 납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사랑하니, 떨어져 있어도 멀어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간직하니,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으리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세상은 변하고 조상사모(祖上思慕)하는 마음 옛 같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이번에 문중논의를 거쳐 새빗재 선영(先塋)을 정리하여 오대조 고조 증조부모님을 삼가 함께 모시오니 부디 안면하시고 이 터에서 조상과 자손들이 서로 화합하여 그 기운(氣運)이 저희에게 영화(榮華)롭게 하소서!

 

                                                  서기 二ㅇ一一년 신묘 한식 안동권씨 三十四세손 기섭이 삼가 세웁니다.   

    行遠自邇(행원자이)   먼곳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되고
    登高自卑(등고자비)   높은곳은 낮은 곳으로부터이니
    根深枝暢(근심지창)   뿌리깊은 나무 가지가 울창하고
    源濬泉達(원준천달)   근원이 깊음 샘 그침이 없다.

    鬱鬱深山(울울심산)   깊은 산 울창한 곳
    雲遊留宅(운유유택)   구름 흘러 머무는 이곳



    時時孫訪(시시손방)   때때로 자손들 찾아오니
    欽祖兪光(흠조유광)   흠모하는 마음 점점 더 깊어간다.

    權門之孫(권문지손)   여기 권문의 자손들아
    眞積力久(진적역구)   참을 쌓고 힘을 길러
    立志揚名(입지양명)   뜻 세우고 세상에 이름 날려
    輝門永久(휘문영구)   문중을 길이 빛낼지어다.

                                    三四世孫 永燮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