僕射公 諱守洪 判書公 諱靷 忠定公 諱橃 冲齋博物館 入三陟派祖 諱凍 諱禧度 諱禧度系 世系圖  
      <先祖探究>                   入三陟派祖 諱 凍(동)
세상을 등지고 삼척 어리동에 복거하시다.
 20세 충재공(冲齊公) 휘벌(橃)은 直長을 지낸 和順崔世演의 女息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시니 맏이는 草溪郡守를 지낸 靑巖公 諱東輔이고, 둘째는 燕岐縣監을 지낸 諱東美이시다. 靑巖公은 鄕試에 壯元하여 獻陵參奉(헌릉참봉)이 되었으나 부친이 북변으로 유배되어 돌아가시자 천리 배소에가 返葬하고 이듬해 봉화로 옮겨 장사하였다. 公은 국가와 집안의 비상지변에 통분하여 진취할 뜻을 접고 청암정에서 후학을 위해 힘쓰다가 명종말에 國是(국시)가 안정되자 다시 관작을 받아 直長(직장), 主簿(주부), 佐郞(좌랑), 正郞(정랑)을 거쳐 초계군수를 지냈다. 그 후 漢城判官, 昌寧縣監, 慶山縣令 등을 역임하고 淸州判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墓所는 봉화 유곡 닭실 선고묘소 위쪽에 계좌이고 許穆이 비문을 지었다.

石亭公 휘東美(동미)의 字는 子休 號가 石亭이고 中宗20年(1525) 7월 15일 나서 退溪 李滉 門下에서 修學하고 宣祖1年 增廣試에서 安東거주 幼學으로서 進士3등 제62인으로 합격하였다. 그해 가을 掌苑署別坐로 제수되고 造紙署로 옮겼다가 선조4년 봄 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이듬해 宜寧縣監나갔다. 선조10년 봄에 燕岐縣監으로 옮겼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한거하였다. 선조17년 봄에 司憲府監察로 조명되고 겨울에 龍宮縣監으로 出補되었는데 익년 3월 임소에서 병졸하니 수는 61세였다. 著書로 石亭逸稿를 남겼다. 配 恭人奉化琴氏는 府使 의(椅)의 딸로 無育이고 配 恭人晋州柳氏는 의(義)의 딸이다. 1594年卒. 墓所는 봉화읍 유곡리 닭실의 선고묘소 白虎嶝에 子坐로 連墳이며 위쪽이 公과 금씨이고 아래가 유씨이다. 伯氏 靑巖公이 비문을 지었다. 여섯아들을 두셨는데 장자 采(채)의 字는 公亮(공호) 號는 松巖亭(송암정)이며 義興縣監, 軍資監正을 지냈고, 次子 來(내)의 字는 樂而(낙이)로 伯父 東輔의 養子로 出系하였고, 三子 集(집)의 字는 仲成으로 主簿(주부)를 지냈으며, 四子 棐(비)의 字는 學而(학이)이며 선조3년(1570)에 나서 70세로 졸하셨으며 관직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없다. 配 羽溪李氏는 將仕郞 廉(염)의 딸이고 墓所는 봉화 유곡리 大齋뒤 右麓에 艮坐 連墳이다. 五子 策(책)은 宣敎郞(선교랑)을 지냈다.

23세 휘상민(尙敏)은 學而公의 휘비(棐)의 외아들로 宣祖27年(1594)生으로 字는 수용(守庸) 號는정수제(政樹齋)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시고 孝宗9年(1668) 75歲로 卒하셨다. 配는 咸陽朴氏로 참봉 종언(庭彦)의 딸이고 墓所는 봉화 유곡 삼계서원 뒤에 子坐合窆이다.

24세 휘동(凍)은 光海君6年(1614)에 출생하여 봉화 유곡에서 수학하였으나 뜻하신 바 있어 三陟의 五柳村(지금의 於里)에 들어가 始居하시니 입삼척권문의 으뜸이시다. 肅宗11년(1685) 2월 6일에 72세로 돌아가셨다. 配는 丹陽禹氏로 夏鎭의 딸이며 光海君9년에 나서 肅宗6년 64세로 졸했다. 墓所는 三陟郡 於里 大法心山 아래 甲坐 合窆이며 두아들을 두시니 장자는 휘두관(斗寬)으로 字는 聖信이고 折衝將軍을 지내셨으며, 차자는 휘두백(斗伯)으로 字가 聖中이다.

입삼척파조 휘동(凍)묘소 전경, 좌로부터 묘소 묘비 慶遜公효자비각



嘉善大夫安東權公諱凍墓碣銘

譜有序文墓有表文名雖不同其尊先祖模後孫義實一揆唯我宗之祖誕于花山酉谷避穢亂於江伯晉州始卜居下長面深去之地名曰五柳洞今於里也於是乎以松栢志條固守於陶潛之遺風及夷齊之淸廉曼 祖大匡太師公諱幸之苗裔也 中祖銀靑光祿大夫僕射公諱守洪十五代祖也 右贊成領議政忠定公冲齋先生諱橃五代祖也 號石亭進士縣監諱東美曾祖也 祖諱棐也 父諱尙敏也 公諱凍字元卿甲寅生肅宗乙丑二月六日卒墓於里大法心山下甲坐配丹陽禹氏丁巳生肅宗庚申八月二十四日卒墓合窆 距十代子孫繁衍布濩四隅如水之一源而有派流之盈涸也 喩焉吾派之門昌大云大祖表文未錄遺感矣故宗老合辭而樂出醵金將付手民責弁首文於余自顧凉學於祖先受恩苟愧矣以畧書徨紀上下系代而雖爲銘伊后亦有榮焉吾宗諸員常自瞭視於心目之間則先彰後彬以曉後生故其於風化有小補云爾公生二男此下列錄焉
銘曰
陟州又西 十二曲上 午丁高首 辰竝逶迤
名勝一區 五柳村中 渴馬飮水 小祖落下
大法山下 二巷合水 官星明照 子孫振詵
命之繭室 案有積會 不朽功名 追進榮光

西紀一九六七年 丁未 桂秋 中浣立 九世孫珷淵謹撰
三陟后人 金明魯 謹刻


가선대부안동권공묘갈명병서

대동보의 서문과 묘의 표문이 비록 같지는 않으나 선조로부터 후손에 이르는 사실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종조께서 화산 유곡에서 탄생하셨는데 강백진주의 추악한 싸움을 피하여 하장면 깊은 곳에 들어가 복거를 시작하시니 그곳의 지명이 오류동이었는데 지금의 어리이고, 이는 송백의 지조로 도연명의 풍류와 백이숙제의 청렴함을 굳게 지킴을 이름이다.
시조 대광 태사공 휘幸의 후예로, 중조이신 은청광록대부 복야공 휘守洪은 15대조이시고, 우찬성 영의정을 지내시고 충정공시호를 받은 충재선생 휘橃은 5대조이시며, 호가 석정이고 진사 현감을 하신 휘 東美는 증조이시고, 할아버지는 휘棐, 아버지는 휘尙敏이시다.
공의 휘는 凍이고 자는 원경으로 갑인년에 나셔서 숙종 을축 2월 6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어리 대법심산 아래 갑좌에 계신다. 배는 단양우씨로 정사년에 나셔서 숙종 경신 8월 24일 돌아가시어 함께 묻히어 계신다.
10여대를 내려오는 동안 자손은 번창하여 사방으로 한줄기 물처럼 뻗어나가니 그 물줄기가 매마른 곳을 가득 채우는 구나.
돌아보면 우리의 문중이 창대하여졌음에도 大祖의 비문을 모시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해왔는데 종가의 어르신들이 한마음으로 기쁘게 금전을 갹출하고 주민들이 빚을 내고 손을 모아 이제서야 비문을 마련하니 우리 스스로 부족한 배움을 탓하고 선조로부터 받은 은혜 진실로 부끄럽구나. 글을 읽고 위 아랫대의 규칙을 정함은 비록 마음에 새기기 위함이나 이로 인하여 영화로움 또한 있을 것이다. 우리의 종친 모두가 항상 스스로를 밝게 하여 마음의 눈을 먼저 밝히면 뒤에 빛나는 생을 살것이니 이러한 풍속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공는 2남을 두었으며 그 후손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명에 이르기를
척주에서 또 서쪽, 열두골자기를 넘어서면
한나절 되어야 해 뜨고, 별들도 구불구불
아름다운 곳 그곳, 오류촌이라는 마을에
목마른 말 물 마시는 곳, 우리의 할아버지 머무시니
대법심산 아래, 두 골자기 물이 모이고
임금별이 밝게 비추어, 자손들이 넘쳐난다.
누에고치로 연명하나, 지식을 쌓고 모아
공을 세운 그 이름 빛나니, 영원히 영광 있으라.

서기 1967년 정미 계추 중완이 세우고 9세손 무연이 삼가 지음
삼척인 김명로가 새김

이 번역문은 불초소생(rocky)이 최선을 다했지만 곳곳에 오역이 있을 것이므로 참고만 하시고 절대로 옮겨 사용하지는 마십시요.
<江伯晉州> <江伯 : 강물귀신을 이름>, <陶潛 :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 字:淵明>, <夷齊 : 백이숙제(伯夷叔齊)를 줄여서 부르는 말>

25세 휘두관(斗寬)의 字는 성신(聖信)이고 肅宗 戊子年에 나셔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내셨으며 英祖34年 1758년 5월 2일 卒하셨으며 配 淑夫人蔚珍張氏는 嘉善大夫 해운(海雲)의 딸이다. 墓所는 三陟 於里 三加谷 甲坐에 合附이며, 세아들을 두시니 장자는 휘창(菖)으로 字는 和五이고, 차자는 휘맹(萌)이니 字가 明五이고, 삼자는 휘삼(蔘)으로 字가 仁五이다.

좌로부터 묘소 전경, 묘비의 전면, 후면

26세 휘창(菖)의 字는 화오(和五)로 英祖1年(1725)에 나서 正祖17年(1793) 7월 18일 69세로 卒하셨으며 墓所는 三陟 下長面 葛里谷 庚坐이다. 配 晋州姜氏가 29세에 돌아가심에(墓: 於里先祖墓左側艮坐) 全州李氏와 재혼하였으며 李氏는 尙業의 딸로 1752년에 나서 1819년 68세에 卒하였고 墓所는 於里 三加谷 先塋下坐이다.

27세 휘정의(正義)의 字는 덕지(德之)이고 英祖42年(1766)에 나서 1821年7月6日에 돌아가셨고 配는 慶州崔氏로 武壯의 여식으로 1762년에 나서 1821년 11월 15일 60세로 卒하셨으며 墓所는 三陟 下長面 龍淵里 白楊田嶝 子坐合窆으로 孫子 祉度가 墓表를 지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파손되어 2013년 4월 23일 8世孫 起燮이 墓所를 整備하고 石物을 具備하였으며 6世孫 大龍이 碑文을 썼다.


28세 휘사숙(思琡)의 字는 윤집(允執)이고 正祖12년(1788)에 나서 1847년 4월 24일에 돌아가셨으며 墓所는 龍淵 白楊田先塋 亥坐이다. 2013년 4월 23일 墓所를 整備하고 石物을 具備하였으며 6世孫 大龍이 碑文을 썼다. 配 延日鄭氏는 光復의 딸로 1793년에 나서 1860년 7월 25일 68세로 卒하였고 墓所는 下長面 葛田谷先塋下 庚坐이다. 두 아들을 두시니 맏이가 휘지도(祉度)로 字는 이언(彛彦)이며 두 아들(載宇, 載宙)을 두었으나 장자 載宇의 후사가 없자 동생 禧度의 長孫 肇夏를 系子로 하였다.
둘째는 휘희도(禧度)로 字는 이중(彛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