僕射公 諱守洪 判書公 諱靷 忠定公 諱橃 冲齋博物館 入三陟派祖 諱凍 諱禧度 諱禧度系 世系圖  
      <先祖探究>                   判書公 諱 靷(인)


  판서공(判書公) 휘(諱) 인(靷)은 안동권씨 15世로 복야공파조(僕射公派祖)이신 휘 수홍(守洪)의 5世孫으로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 23年 文科에 壯元하여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과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를 제수받으셨다.

 公의 증조(曾祖)는 휘(諱)가 윤평(允平)이고 증(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구(具)로 흥위위(興威衛) 보승호군(保勝護軍)이며 선고(先考)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휘(諱) 세진(世珍)의 독자(獨子)이다.

  안동권씨는 10世에서 15大波, 15世에서 다시 11支派로 분파(分派)되는데 이분이 판서공지파(判書公支派)의 지파조(支派祖)이시다.  


판서공 휘 인의 묘소(서후면 교리)

공(公)께서는 안동부(安東府) 송방리(松坊里)에시거(始居)하셨으며 配는 정부인(貞夫人) 한성황씨(漢城黃氏)로 전객령(典客令) 지현(之鉉)의 딸이시다 . 慶北 安東市 西候面 校里 송파(松坡) 건좌(乾坐)에 합장(合葬)되어 계시고, 묘에는 공의 11세손 승서(承緖)가 세운 작은 비석이 있고 재사 오른쪽에는 18世孫 상규(相圭)가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撰)하였다.

公의 子는 후(厚로) 창신교위(彰信校尉) 응양위(鷹揚衛)를 지내신 중랑장공(中郞將公)이시고, 딸은 정랑(正郞)인 손순백(孫順伯)에게 출가했다.

孫子 휘(諱) 계경(啓經)은 선교랑역청하횡성현감(宣敎郞歷淸河橫城縣監)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었으며 묘소는 판서공 계하에 있다.   현감공(縣監公) 휘(諱) 계경(啓經)은 개(玠)와 곤(琨)을 두었는데 개(玠)는 태종 16년 출생하여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신교위부사정(彰信校尉副司正)이 되었으며 아우 곤(琨)과 화산우향계(花山友鄕稧)를 조직하고 서거정(徐居正)과 시가계축(詩歌稧軸)을 만들다 미완하였는데 장자 숙형(叔衡)이 대신하였다.





판서공 신도비
  
                
奉翊大夫禮儀判書權公神道碑


洪惟我十八世祖考禮儀判書公衣舃之藏在安東治西松坡向亞之原法宜銘神道以歷世未運今年夏宗議僉同旣伐石銘詞之貴猥及相圭藐玆不肖不惟不甚承當謹按墓碣書奉翊大夫禮儀判書八世孫石溪公碩忠追遠錄曰洪武甲寅文科壯元官至禮儀判書又按三塘金公瑛撰 贈吏判公琨墓碣稱公謂嘉善大夫漢城尹蓋奉翊禮儀高麗官方也 嘉善漢尹朝鮮職名也 碣面之不書漢力而必書禮儀何也以此難愼而不敢下筆更교嶠南誌曰官禮儀判書 康獻王除漢城左尹不赴遯于所野村有淸節扵是乎知 聖朝則有錫爵之命而公實守岡僕之義也 碣面之特書麗職豈非遵承公遺太者乎 當是時金索村仰藥自裁吳錦山有徵輒洗耳二公皆公之姻親心友也 其扵自靖之義必有所相講者不赴遯野之云當爲千古證案也 竊감聞先父老之言曰所野之改名松坡自公始又감교九世孫東巖公省吾聞見錄曰公自號松坡恐亦寓不태松京之意顧其蹟隱微末有能稱述之者豈非有晜百世之恨也哉公諱靷姓權氏高麗太師幸之后 高祖子輿金紫光祿大夫兵部尙書 曾祖允平銀靑光祿大夫贈樞密院副使 祖具奉順大夫保勝大護軍考世珍判典客寺事致仕妣寧海朴氏軍器監洪茂女配管城黃氏典客令之鉉女生一男厚中郞將女壻孫順伯兵郞中郞將男啓經縣監贈吏參自經中郞將敏經生員女壻金孝貞吏判諡文靖南義良校尉權尙宜監務吏參男玠司正琨副護軍贈吏判 女壻李時敏校理 贈副學郞將男璘部將女壻具仁恕參軍 贈通禮李美孫生員男德箕訓導司正男叔衡司猛叔均進士吏判南士英習讀士彬生員贈領相以子橃忠定公貴士華校尉士秀察訪以下不可盡錄而名卿碩哲文章德學代不絶書大易善慶之理有如是夫銘曰
太師賢裔 光祿世嫡 學優而仕 位躋宰列 豈不煒赫 而秉淸德 萬壽隍圮 鼎移三角
漢尹何官 義維罔僕 盍歸去來 我有天日 行危而遜 涒泯無跡 有跡必發 厥理不忒
慶流來晜 其麗千億 或顯于朝 身任社稷 或修于家 望重牌拂 前光後映 爲世大閥
有隆樂石 羡道之側 恭述銘詞 千世于質

十八世孫 相圭 謹撰
外裔 眞城李秀杰 謹書
十九世孫 魯燮 書前面

洪武甲寅後十乙酉十月 竝立





봉익대부예의판서권공신도비



깊이 생각건대 우리 18대 할아버지 예의판서공의 의관과 신발을 묻은 곳은 안동 치서 송파의 들을 향한 언덕인데 오랜 세월 신도비를 세우지 못해오다 이번 여름 문중회의에서 모두 이미 다듬어 둔 돌에 비록 못나고 생각이 깊지 못하지만 상규(相圭)가 감히 봉익대부 예의판서의 묘갈을 쓰기로 했다. 8세손 석계공 석충(碩忠)은 추원록에서 공께서는 홍무 갑인년에 문과에 장원하고 관직이 예의판서에 올랐고 또 삼당 김영(金瑛)이 쓴 이판공 곤(琨)의 묘갈에 이르기를 공이 가선대부 한성부윤이라 하였는데 봉익대부는 고려의 관직이고 가선대부 한성부윤은 조선의 관직이다.
갈면이 부족하지만 예의판서가 어떤 직책인지 신중히 감히 고쳐 쓰는 것은 교남지에 예의판서란 관직은 강헌왕(태조)이 한성좌윤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소야촌에 물러나 청절을 지킴을 이름이요 성조에서 벼슬한 공이 그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킴이요 또 고려의 직책을 특별히 적은 것은 공의 남긴 거룩한 뜻을 쫒기 위함이며 이는 마땅하고 옳은 일임에 시골에 은거해 약을 캐고 옷을 스스로 말라 입으며 귀를 막으니 이는 두 사람 모두 공의 친한 지우인지라 탄식함이다. 스스로를 평안히 하고 서로를 정리하는 의리로 벼슬하지 않고 초야로 물러났음이 수 천 증거로 남아있다. 선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소야를 송파로 개명한 것도 공이 시작이고 또 9세손 동암공이 자세히 살펴보니 공께서 스스로 호를 송파라 하시고 송도를 떠나 그 자취를 숨김이 어찌 백세에 이를 한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인(靷)이요 성은 권씨이니 고려태사 휘 행(幸)의 후손이다. 고조부 자여(子輿)는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를 지내셨으며 증조부 윤평(允平)은 은청광록대부 증추밀원부사를, 조부 구(具)는 봉순대부 보승대호군을, 선친 세진(世珍)은 판전객사사 치사를 지내셨으며 자당 영해박씨는 군기감을 한 홍무의 딸이다. 배 관성황씨는 전객령을 지낸 지현의 딸이며 외아들을 두셨는데 중랑장을 지낸 후(厚)이다. 사위 손순백은 병랑중랑장을, 장손 계경(啓經)은 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셨고 차손 자경(自經)은 중랑장을, 차손 민경(敏經)은 생원을 지냈고 서손 김효정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문정공이며, 그의 아들 의량은 교위를, 상선은 감무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장증손 개(玠)는 사정을 지냈고 차증손 곤(琨)은 부호군을 지내고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서증손 이시민은 교리를 지내고 부학랑장으로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인은 부장, 사위 구인서는 참군을 지내고 통정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이미손은 생원을 지내고 그의 아들 덕기는 훈도사정을, 숙형은 사맹을 지냈다. 이판공의 장자 사영(士英)은 습독하였고 차자 사빈(士彬)은 홍문관관상감사를 지내고 아들 충정공 벌(橃)의 귀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차자 사화(士華)는 교위, 사수(士秀)는 찰방을 지냈으며 이하 모두를 적을 수는 없고 명경 석학 문장가가 대대로 그치지 않아 쓰기가 쉽고 경사스럽기 이를데 없다.

명에 이르기를
태사공의 현명한 후손들이 대를 이어 빛나는 벼슬을 하고
선비로서 학문이 우월하여 그 위치가 재상의 반열에 오름이
어찌 빛나지 않으리오? 청렴하고도 덕망이 높으셔서
만수산이 무너지고 한양으로 천도할 때
한성부윤을 마다하고 의로운 밧줄과 그물로 자신을 묶어
칩거하여 돌아오지 않으셨도다. 오직 하늘과 해에 자신을 맏기심이니
겸손함으로 위험을 맞아들이고 멸망하여 자취가 없어져도
발자취는 필히 남는 것. 그 이치는 변하지 않으니
경사로움이 후손에게 와서 화려함이 영원하네
조정에 나아가시면 사직에 몸을 맏기셨고
집안을 다스릴 때는 상벌을 중히 여겨시니
먼저 빛나고 뒤에 비추이듯 후세를 위해 큰 공을 세우셨도다.
아름다운 돌을 얻어 산소 가는 길 한 편에
정성스레 명을 지어 바치오니 천세에 이르길 바라나이다.

십팔세손 상규 삼가 짓고
외예 진성이수걸 삼가 쓰고
십구세손 노섭이 앞면 글씨를 쓰다.

홍무갑인후십(1969년) 을유 시월에 세우다.



이 번역문은 불초소생(rocky)이 최선을 다했지만 곳곳에 오역이 있을 것이므로 참고만 하시고 절대로 옮겨 사용하지는 마십시요.

洪武甲寅後十
홍무(洪武)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연호로 명나라 최초의 연호이다. 1368년부터 1398년까지 31년간 쓰였는데 우연히도 조선의 건국이 1392년이므로 홍무라는 연호를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홍무 갑인은 1374년이며 이후 10갑(600년)이 흐른 1974년이고 을유년은 1969년이므로 신도비를 세운 연대는 1969년 10월임.






묘에서 1㎞ 정도 떨어진 안동부 송방리(지금의 대석촌(평촌마을))에는 판서공의 遺墟碑(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출생하신 곳임을 알리고 있다.
유허비의 원문과 번역문을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高麗禮儀判書權靷遺墟
玆松坊里大石洞卽我十三代祖考禮儀判書府君毓降之地也 洞之廢不知幾許世竊有海▨ 桑海草緡之歎徃在六十年前宗中先父老盡然興傷發立碑表誌之論而尙此未遑焉今年春始 伐石竪之於基之南距衣履藏間一麓自此爲子孫者登壠澆掃之感拜石愴恨之懷將千歲如一 日而大石一洞庶幾與此石不泐矣於乎府君事蹟無所考徴然永樂第榜且出於一善金氏家以 淸白拔擢官至禮儀判書十一字載永嘉邑誌斯可略得其影響而乃若勳業事行世代寢遠家乘 不傳藐玆雲仍只自适聽曠感而不能徴其彷彿焉豈非千古無窮之憾耶是役也族君範洛以中 實倡蕬之俾思浹識其陰思浹何敢當而若其立石顚末不必籍手於秉筆家玆敢忘僭率略記之 崇禎紀元後四去甲申 月 日
十三世孫 思浹 撰」
外裔光山 金弘奎 書」


예의판서 권인유허비(禮儀判書權靷遺墟碑)
고려(高麗)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 유허(遺墟)

이 송방리(松坊里) 대석동(大石洞)은 곧 나의 12대 할아버지이신 예의판서(禮儀判書) 부군(府君)이 태어나신 곳이다. 마을이 폐하여 없어진 지가 오래라 쑥밭으로 변했으니 탄식하여 지나간 60년 전에 중종(宗中)의 선부께서 처참한 마음으로 비를 세워 터를 표시하자는 의논을 내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더니, 금년 봄에 비로소 돌을 다듬어 그 터의 남쪽에 산소와의 한등사이 거리에 세웠다. 이로부터 자손되는 자가 무덤에 올라 요소(澆掃 : 물뿌리고 청소함)하는 느낌과 돌에 절하고 창한(愴恨 : 원망하고 한을 품음)한 회포가 장차 천년의 세월이 한날 같아서 커다란 비석 한 골짜기가 거의 이 돌과 같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부군(府君)의 사적을 상고할 바가 없으나 영락(永樂)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한 일선(一善)의 김씨(金氏) 집에서 나온 ‘이청백발탁관지예의판서(以淸白拔擢官至禮儀判書)’ 11자가 영가읍지(永嘉邑誌)에 실린 것만으로도 가히 그 이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실행한 공적은 세대가 오래되어 가승이 전하지 않아 아득한 후손이 다만 듣고 느끼는 마음으로는 비슷하게 기록하지 못하니 어찌 천고에 끝이 없는 한이 아니겠는가? 이 비를 세움에 권씨 가문의 권범락(權範洛)이 실제로 주창하여 감독하였고, 권사협(權思浹)이 그 음기(陰記)를 기록하였는데 권사협이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그 입석의 전말을 기록하는 일이라면 꼭 문장가의 손을 빌릴 것 없기에 감히 참람됨을 잊고 대략을 기록하였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갑신년(순조 24, 1824년) 월 일
13세손 권사협(權思浹) 찬하다.
외예(外裔) 광산(光山) 김홍규(金弘奎) 글씨를 쓰다.




송파제사 松坡齋舍

  송파재사(松坡齋舍)는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교리(校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복야공 단소와 판서공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묘소 아래에 1743년 8칸으로 창건하였다가 1748년 ㅁ자형으로 중창한 목조와가이며 대청과 서재는 건축연대를 가름할 수 있는 귀중한 양식(樣式)이다. 

재사에는 「송파재사(松坡齋舍)」라는 현판과 13세손 범조(範祖)가 쓴 중창기, 18세손 정일(正鎰)이 쓴 중수기와 비각기(碑閣記)가 게판(揭板)되어 있다.

2001년 11월 1일 경북유형문화재 제32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8월 8일 국비와 지방비로 중수된 사묘재사이다 .



 

안동권씨 송파재사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유형문화재 326호로 2001년 지정

 

안동 권씨 복야공 묘단과 판서공파의 시조인 권인(權靷)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재실이다. 권인은 안동 권씨 판서공파의 시조로서 고려 말∼조선 초의 인물이다. 재사의 동편 언덕에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 서측으로는 비각이 만들어져 있다.

송파재사는 야산을 배경으로 동남향하여 앞쪽의 송야천을 바라보고 있다. 맨 앞쪽 대문채의 양 끝이 한 칸씩 돌출되어 있는 '口'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자리한 마당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기 좌·우익사가 배치되어 있고 건너편에 몸채가 놓여 있다.
 


몸채의 대청이 두 칸으로 구성되어서 좌우로 길게 확장된 대문채에서 느꼈던 건물의 규모보다 안마당이 작다는 느낌을 갖을 수도 있는데, 대문채는 가운데에 문간이 있고 몸채는 두 칸의 가운데에 기둥이 있어서 기둥열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채에 비해 몸채(안채)가 더 크고 굵은 부재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칸의 규모와 높이가 높아서 칸의 폭이 다르게 구성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대문채는 가운데 칸에 대문을 내고 그 좌측으로는 온돌방·뒤주·외양간 순으로, 우측으로는 온돌방·광 순으로 배열했다. 대문채의 좌·우측 끝에 각기 외양간과 광이 1칸씩 돌출 되어 있다. 몸채는 가운데에 넓은 대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좌익사에는 온돌방·서재·통래간을, 우익사에는 온돌방·동재·부엌을 두었다.

이 재사는 조선 영조 19년(1743)에 8칸 기와집을 사서 사용하여 오다가 영조 22년(1746)에 초가 4칸을 더 넓혔으나 이도 역시 좁다고 생각되어 영조 24년(1748)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 1748년 중건 당시의 평면구성과 구조양식에 큰 변화없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대청과 서재에 설치된 영쌍창(두짝의 창호 중간에 설주를 세워 양쪽 창을 열면 창호 가운데 기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창)은 17∼18세기 건축물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건축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창호양식이다.


대청에 만들어진 판문 사이에 설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쌍창)











사진이 작게 업로드 되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두 짝씩 만들어진 창호 사이에 설주가 세워져 있다.






 
 

 
 

  吏判公 諱 琨



선락장군 곤의 묘소(와룡면 태리)

   자는 가진(可珍)이며 판서공(判書公) 휘(諱) 인(靷)의 증손으로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휘(諱) 계경(啓經)의 차자이다. 세종 9년인 1427년 정미(丁未)에 출생하여 호군(護軍)의 관작(官爵)을 받았다. 호군(護軍)은 조선조 때 오위(五衛)에 딸린 정4품 벼슬로 현직이 아닌 문관, 무관, 음관(蔭官)에게 주던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덕망 있는 분들과 우향계를 맺고 교유하니 향당부로(鄕黨父老)의 칭을 받아 진고지향(眞古之鄕) 선생이 되었다. 연산군 8년인 1502년 임술에 76세로 졸(卒)하였는데 손자 충정공(忠定公) 휘(諱) 벌(橃)이 귀히 됨에 따라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 공은 형 사정공(司正公) 휘(諱) 개(玠)와 더불어 향당에서 추증을 받고 명성이 높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貞夫人) 서원정씨(西原鄭氏) 좌랑(佐郞) 약(若)의 딸이며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 소등촌 진봉산(振鳳山)에 자좌(子坐)로 합폄(合窆) 되어 있고 삼당(三塘)인 김영(金瑛)과 현손으로 정랑인 위(喡)가 그 비문을 지었다. 아들은 습독(習讀)인 사영(士英), 증(贈) 영의정(領議政)인 사빈(士彬), 사화(士華), 사수(士秀)가 있고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현감 이대근(李大根)에게 출가했다.

   所等齋舍





선락장군 곤을 위한 재사(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경북 중요민속자료 204호


 소등재사(所等齋舍)는 와룡면 태리의 소등촌에 있으며 이판공(吏判公) 휘(諱) 곤(琨)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이다. 영조 2년(1726년) 내당인 추원재를 건립하여 1727년에 증축하고 2004년 중수하였다. 이 재사는 ㅁ자형으로 안채는 15칸이며 동재와 서재가 있고 아래채는 13칸으로 처음 건립당시 모습을 잘 갖추고 있어 중요민속자료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판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사영(士英), 차가 사빈(士彬)이고 사빈은 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야옹공(野翁公) 의(檥), 차자는 충재공(冲齋公) 벌(橃), 삼자는 예(欚), 사자는 장(檣)으로서 종보 제369호(2006. 3. 1)와 제388호(2007. 10. 1)에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