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近思錄原文 近思錄飜譯

근사록(명간본)

근사록은 송대의 성리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와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공저한 성리학서이다. 모두 14권이다. 1175년(淳熙 2년) 여조겸이 주희를 방문하여 10일간 머무르면서 함께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어록』, 『문집』 등을 읽고,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 사상의 줄거리 가운데 학문을 다스리는 대강과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 622 조목을 뽑고, 왕복 편지를 편집해서 1178년 4월에 완성하여 『근사록』이라 이름했다. 책이름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근사란 일상 생활에 절실한 사실을 묻고 생각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나의 몸에 가까운 문제에서 출발하여 깊은 이치에까지 미친다는 말이다. 이 책은 의리(義理)를 주로 하여 어느 것은 한 편을 다 싣고, 어느 것은 한두 구절을 따고, 혹은 『어록』, 『문집』에서 초록하여 체제가 일정하지 않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철학자 주희

주희는 14권을 여섯 강목으로 요약했는데 첫째 구단(求端)은 권 1 도체(道體), 둘째 용력(用力)은 권 2 위학(爲學)ㆍ존양(存養), 셋째 처기(處己)는 권 5 극기(克己), 권 6 가도(家道), 권 7 출처(出處), 넷째 치인(治人)은 권 8 치체(治體), 권 9 치법(治法), 권 10 정사(政事), 권 11 교학(敎學), 권 12 경계(警戒), 다섯째 권 13 변이단(辨異端), 여섯째 권 14 관성현(觀聖賢)이다. 『주자어류』 권 105에서는 따로 편을 따라 강목을 만들어 14권을 총괄했다. 그것은 1) 도체(道體), 2) 위학대요(爲學大要), 3) 격물궁리(格物窮理), 4) 존양(存養), 5) 개과천선(改過遷善), 극기복례(克己復禮) 6) 제가지도(齊家之道), 7) 출처진퇴사수지의(出處進退辭受之義), 8) 치국평천하지도(治國平天下之道), 9) 제도(制度), 10) 군자처사지방(君子處事之方), 11) 교학지도(敎學之道), 12) 개과급인심자병(改過及人心疵病), 13) 이단지도(異端之道), 14) 성현기상(聖賢氣象)이다. 그러나 주희가 죽은 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기억과 표출에 불편하다 하여 그 대의를 취하고 개수하여 두세 글자로 편명을 정했다. 이렇게 한 것은 남송 섭채(葉采)의 집해본이 처음이며, 이후 관례가 되어 통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도체ㆍ위학ㆍ치지ㆍ존양ㆍ극기ㆍ가도ㆍ출처ㆍ치체ㆍ치법ㆍ정사ㆍ교학ㆍ경계ㆍ변이단ㆍ관성현 등 14항목이다. 권 1 「도체」 51조는 도의 본연의 체단을 밝히고 학술의 요점을 총론한 것이다.

『근사록』 편집자의 한 사람인 여조겸

권 2 「위학」 111조는 도체를 나에게 온전하게 하기 위한 공부를 서술한 것으로 학문의 본 뜻은 수기ㆍ치인 두 가지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까지는 위학의 본론이고, 권 3에서 권 12까지는 위학의 강목이다. 권 3 「치지」 78조는 격물궁리로서 심체의 밝음을 다하는 방법을 밝히고 있는데 1~22조는 치지의 본질과 방법을 총론했고, 23조~33조는 독서론을, 34조~78조는 독서의 방법에 대해 경전을 인용하여 논했다. 권 4 「존양」 70조는 송학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존양공부로서의 교(敎)에 대해 말했다. 22조까지는 주돈이의 주정(主靜)에 입각하여 정호ㆍ정이의 교설을 말했다. 권 5 「극기」 41조에서는 실천궁행을 말했다. 권 6 「가도」 21조는 제가의 도로서 윤리와 인의를 말했다. 권 7 「출처」 39조는 벼슬에 나아가고 집에 처하는 방법을 고어를 인용하고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서술했다. 권 8 「치체」 25조는 예악형정을 비롯한 제반의 제도를 논했으며 학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권 10 「정사」 64조는 정치에 임하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논했는데, 이 가운데 24개조에 걸쳐 정이의 『역전』을 싣고 역의 도리로써 서술한 곳이 많다. 권 11 「교학」 21조는 의리를 가르쳐 인륜을 밝게 하는 것이 교학의 근본 의미라고 했다. 권 12 「경계」 33조에서는 앞서 말한 것이 과연 몸에 얻어졌는가의 여부와 개과 및 인심의 위태로움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있다. 권 13 「변이단」 14조에서는 신불해ㆍ한비자의 학문을 이단으로 보았고, 위아설의 양주, 겸애설의 묵적의 폐해는 그것보다 심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노자ㆍ불교의 학설은 고상한 형이상학의 설로써 사람을 미혹에 빠지게 하므로 양주ㆍ묵적의 해보다 더욱 심하다고 했고, 신선술에 대해서도 이단으로 보고 비판했다. 권 14 「관성현」 26조에서는 요ㆍ순부터 주돈이ㆍ정호ㆍ정이ㆍ장재에 이르기까지 성현의 지극한 기상을 논했다.

이 책에는 송학의 이념과 체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송학을 배우는 사람들의 필독서였으며, 일종의 철학 선집으로서 '송학의 논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성리대전』(性理大全)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주자학의 보급과 함께 학자들이 이 책을 존중하여 사서, 『소학』과 함께 병칭했다. 주석서 및 참고서로는 송대 채모(蔡模)의 『근사속록』, 『근사별록』, 명대 강기(江起)의 『근사록보』, 청대 강영(江永)의 『근사록집주』가 있으며, 우리 나라 이이의 『근사록구결』(近思錄口訣), 김장생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정엽의 『근사록석의』, 박지계의 『근사록의의』(近思錄疑義), 박이곤의 『근사록석의』 송병선의 『근사속록』, 이한응의 『속근사록』, 김평묵의 『근사록부주』 등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요 철학자들

주돈이(周敦. 1017~1073)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

자는 무숙(茂叔). 사람들은 염계(濂溪) 선생이라고 불렀다. 도주(道州) 영도(營道) 출신으로 20여 년간 정치에 관여하는 동안 현장(縣長)으로부터 각 주의 판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과 법률을 비판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쁜 질병이 유행하는 깊숙한 벽지로 들어가면서까지 무고하게 끌려간 사람들의 죄를 변호했다고 한다.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가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주자전서』(周子全書)로 편찬했다.

그는 『주역』과 도가의 사상을 계승하여 태극 ─ 음양 ─ 만물로 이어지는 우주론을 구성했는데, 이는 유학이 인성론 중심의 선진 유학으로부터 우주론을 포괄하는 신유학으로 전환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인간을 만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존재로 보고, 성인은 태극을 본받아 인극(人極)을 세웠다고 했다. 인극은 곧 성실함[誠]이고 이 성실함은 오상(五常)의 근본인데, 성실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정(主靜)과 무욕(無欲)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심학과 리학의 싹을 품은 정호(좌)와 정이(우) 형제

정호(程顥, 1032~1085)

자는 백순(伯淳). 사람들은 명도(明道) 선생이라고 불렀다. 낙양(洛陽) 출신으로 신종(神宗) 때에 태자중윤감찰어사(太子中允監察御使)를 지냈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낙향해서 교육에 힘썼다. 주공염(朱公)이 여(汝) 땅에서 명도 선생을 뵙고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봄바람 속에서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고 말한 것과 유안례(劉安禮)가 "내가 선생을 30년 동안 모셨는데, 그 분이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얼마나 온화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저술로는 『정성서』(定性書)와 『식인편』(識仁篇)이 있다.

그의 학문 방법은 '인을 인식하는 것'[識仁]을 주로 했고, 성실함[誠]과 경건함[敬]을 강조했다.

정이(程, 1033~1107)

자는 정숙(正叔). 사람들은 이천(伊川) 선생이라고 불렀다. 낙양 출신으로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를 지냈다. 정호의 동생으로, 함께 이정(二程)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호는 항상 화기(和氣)가 있었고, 정이는 엄격한 편이었다. 한 번은 여행을 하다가 두 사람이 사당의 양 쪽 행랑에 투숙했는데, 따라온 학생들이 모두 정호가 있는 행랑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 유작과 양시가 처음 이천 선생을 뵈었을 때, 이천 선생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모시고 서 있는데, 이천 선생이 한참 후에 눈을 뜨고 돌아보면서 '너희는 아직도 여기에 있느냐?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쉬어라'고 했다. 그들이 문을 나서니 문 밖에는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고 한다. 저술로는 『역전』(易傳),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을 위주로 했는데, 그가 말하는 이치는 자연의 이치라기 보다는 도덕적인 이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나아가서[格物] 앎을 이루는 것[致知]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는'[主一無適] 경(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성이 곧 리이다'[性卽理]라는 명제를 내세워 주희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장재(張載, 1020~1077)

기일원적 성리학의 주창자 장재

자는 자후(子厚). 사람들은 횡거(橫渠) 선생이라고 불렀다. 횡거진(橫渠鎭) 출신으로 숭문원교서(崇文院校書)를 지냈다.

장재는 자신의 주위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몹시 동정했지만 스스로도 가난했기 때문에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일정한 산업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도덕적인 삶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아, 친구들과 함께 토지를 매입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할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다음의 시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인류를 위하여 천명을 세우며
가신 성현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

그는 종일 방안에 꿇어앉아서 좌우에 책을 두고, 책을 읽고 생각하다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으며, 혹 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불을 밝히고 글을 썼다. 그는 도에 뜻을 두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고 잠시도 잊지 않았다. 배우는 사람들이 질문하면 주로 '예를 알아 본성을 이루며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배움은 반드시 성인과 같이 된 이후에 그쳐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저술로는 『정몽』, 『경학이굴』, 『역설』 등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장자전서』로 편찬했다.

장재는 기가 만물의 구성요소이며 변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기일원론을 제창해서 이후에 기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기에 대한 생성론 및 존재론을 수립한 것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는 또 기의 변화에 어떤 외재적인 동인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아 기의 존재 근원으로 이를 따로 인정하는 정이와는 다른 세계관을 구성했다.

그는 인성론에서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분했고, 인식론에서 덕성지(德性知)와 견문지(見聞知)를 구분했다.